마가복음 12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고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을 받고자 종을 보내니 때리고 죽이었기에 아들을 보내면 될 것이라 하여 아들을 보내었더니 그 마저도 죽였다는 내용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과 누가복음 20장에도 나오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여느 비유에 비하여 쉽게 보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은 경우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께서 별도로 풀이까지 해 주셨던 것에 비하면 이 비유는 듣고 있던 유대인들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쉬운 비유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영화의 스포일러, 즉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내용이 쉽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것을 다 알고서 성경을 봅니다. 그래서 그것에 기초하여 성경을 보기만 해도 많은 부분이 이해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하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우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었으니 이 비유는 상당히 어려운 비유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오늘날 소위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이 기도나 성경 보는 것이라서 율법 신앙이 아니라고 무덤에 회칠하듯 착각하고 있으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그 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의미의 한정된 내용이 아닙니다. 또 종들이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과 같은 부연 설명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중에 포도원 주인이 왔을 때 항거도 하지 못하고 쫓겨날 정도의 존재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심산이었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포도원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것은 ‘왜 포도원인가?’ 하는 것과 ‘농부들은 왜 소출을 주지 않고 오히려 종과 아들을 죽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난데없이 건축자의 버린 돌에 관한 말씀 인용이 이 포도원 비유에 왜 끼여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하고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혹시 이런 것에 대하여 설교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알아들었지만 오늘날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도 이것을 모릅니다. 모르니 설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라는 것은 또한 짓이겨지고 상할수록 더 가치가 올라가는 과일입니다. 포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지은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소출로 얻겠다는 것이니 결국은 그리스도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람에게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바라심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만드신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시고자 세상 곧 포도원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 삶을 맡기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가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악을 판단하며 살 것인지에 대하여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삶의 소출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 있는지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지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밥을 주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그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그 소출을 구하러 보낸 종을 잡아서 때리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랬던 것은 포도원 주인이 구하는 소출과 그들이 생산한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농부 곧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 소출이 있었는데 주인이 다른 것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가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서 버린 돌이 되었는데, 성전의 의와 가치로는 그 돌이 주춧돌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은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이 소출에 대하여 가진 가치관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드리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 맞추어 기도하는 정성, 새 돈으로 헌금하는 정성, 억지로 일어나서 봉사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로 여겼는데 포도원 주인은 그저 포도만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고 금식하며 거룩한 행세를 하고 다니며 길에 서서 기도하고 성경을 쓰고 읽고 묵상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출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공로를 쌓는 가치관으로 보니 예수님이란 돌은 버리는 것이 마땅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수고와 공로나 제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옳다는 것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섬기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요 하나님 아들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금식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사실은 육신의 것을 구함) 성경보고(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 공부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소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것을 구하러 온 종과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때껏 포도원 주인을 위하여 온 것을 가치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건축자와 성전의 안목과의 차이였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경건해야 하고, 예배는 사람들이 정한 격식에 따라 드려야 하며,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열심히 해야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단번에 ‘신학도 안 한 것이 어디?’라고 하거나 ‘네가 목사냐?’와 같은 반발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이때까지 쌓은 공로가 무력화 되는 것에 크게 반발을 합니다. 소출을 구하는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듯 이 포도원의 비유는 세상을 만드신 창세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명제를 문장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이 비유를 보니 알 것 같다고 쉽게 아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해외 관광지 사진을 보고 아는 척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알아들은 유대인보다 절대적인 무지 상태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그리스도의 본성이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포도원의 소출을 삼으려 한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행한다고 하니 옛날 유대인들 이야기인줄로만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그 말이 얼마나 공로주의적인 것인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소출을 내는 농부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하는 하나님의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포도원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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