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업과 일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즉 잘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보면 하나님이 그러실리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정말로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허락과 관장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떤 세계는 마귀나 귀신이 관장하는 세계인데 그 세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 신앙 안에서의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의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한 부분이라도 지금 마귀가 점령하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주관을 벗어나서 귀신이 주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역을 빼앗긴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다.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바다의 생명에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과 같이 나도 그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되었을 때 비로서 나에게 하나님의 천지창조 5일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도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인식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살아가는 중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복을 주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 다섯째 날의 교훈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그것이 내가 보기에 좋은 일로 여겨질만한 이유가 내 안에 생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갸기 하면 그것이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보기는 힘든 일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안에 어떤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눈에는 종교라는 기준으로 볼 때, 신앙 없이 성공한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보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마귀와 하나님의 대결 구도로 보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가 세상의 어떤 종교와 다를 것은 전혀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고 어떤 것은 가까이 할 것으로, 그 반대편은 멀리할 것으로 나누는 모든 것은 다 이분법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이분법, 이원론적 가치관의 뿌리는 바로 <선악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나쁘게 규정하는 습성은 바로 선악과의 습성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는 그 이름 그대로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 심판하고 입대고 비판할 일이 있게 된다.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비판하고 있다면, 그 안에 선악과의 열매가 아직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바닷속 생명을 복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게 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는 기준 아래서, 바닷속의 생명,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잘 먹고 잘 살게 되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알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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