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만진바 된 영원한 생명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것에 관해서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고, 그 생명의 말씀은 사람이 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구원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한 역설적으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존재라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들도 육신을 입은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약속이고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에게 있어 영지주의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육신이나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또한 사람의 삶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고 희망을 져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 그 자체인 말씀을 말하고, ‘뤠마’ 혹은 ‘쉐마’라고 기록된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육신이 된 말씀을 말하며, ‘케리그마’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선포되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생명의 말씀이 나타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고, 그 예수님, 그 생명,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사람이 만질 수 있고 듣고 볼 수 있는 존재, 즉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라, 존재 본연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잘 수행하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람이어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존재,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이는 성경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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