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재림이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경을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경의 무엇을 믿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걸 믿는다. 그런데 이 영적 변화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는 데는 하나님의 실존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으로선 하나님을 신으로 검증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큰 기준으로 삼는다. 기적과 신비한 일은 신의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게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실존과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준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와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에도 늘 표적을 구했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운명에 대한 애착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고, 믿음이란 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의심과 믿음에 관한 생각은 성경에 있는 내용들, 그것도 기적과 신비한 일들이 실재 사건이었는지를 검증하게 한다. 그래서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모임도 있다. (1981년 설립) 그뿐 아니라 인공위성으로 노아의 방주로 보이는 사진이라면 언론에 공개된 적도 있고, 지구의 자전 주기를 역산하면 히스기야가 해를 뒤로 물린 시간과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해가 멈춘 시간을 합한 시간만큼이 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신비하고 기적적인 사건이나 기록들이 어떻게 하다 과학으로 증명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을까? 또 지금은 인공위성과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실시간 중계가 되고 있고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므로 훗날 예수님이 공중 재림을 하실 때 실시간 중계될 게 틀림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땅에 완전히 착륙하기 전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까?
나는 장담하건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건 줄탁동시 같아서 내 밖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내 안에 연결고리나 가치관 혹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거의 망했고, 사회주의가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다는 게 완전히 증명되었지만, 자기 형편과 가치관과 생각을 사회주의에 투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봉하는 것과 같다.
이를 정리하면, 사람들은 기적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기적과 신비한 일들의 사실성, 실존적 증거를 찾아서 그걸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만 막상 그런 사실이 하나님을 믿는 동력이 되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유익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예수와 성경을 믿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먼 나라 역사와 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기적이 있었다는 걸 탐구하여 믿는 식의 믿음은 시간상으로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다는 성경 기록의 사실 여부고, 또 하나는 종말론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에 관한 믿음이다. 사실 후자가 더 믿기 어려운 일이다. 통계적으로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높은 확률을 가졌다고 해서 다음에 또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과거 기록이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미래를 사실로 단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역시 재림과 종말론이 그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객관적 사실을 믿는 믿음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은 객관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무시할 수준인가? 그건 또 아니다. 본질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하는 게 중요한데, 본질은 객관적 사실과 말 그리고 표현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기본 원리다. 영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객관적, 과학적으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형식 있는 존재가 아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정체성이 이를 대변한다. 더욱이, 아니 이런 하나님의 정체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객관적 현상과 실존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해 물리적 세상과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씀과 물 위를 걸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들은 모두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선 믿기 힘든 수단이나 방법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데 뭘 못하시겠는가? 다만 우리는 그의 행하심이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상고해야 한다. 중풍 환자를 고치셨다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는 '내게 그런 능력이 있으니 나를 믿으라'는 게 아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육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상태를 바로 잡으신다는 걸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시는 근원적인 방법은 현실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좀 더 설명을 이어간다면, 객관적 사실의 대표인 육신과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표현된 형식이다. 당연하게도 내용과 형식 중 본질은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형식이 없다면 내용을 인지할 수 없고, 인지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형식이 없다면 내용이 무의미해진다. 본질이 무엇이냐는 논한다면 당연히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을 배척한 내용은 또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셨다면, 사람이란 육신을 가진 존재는 필요 없다. 이런 하나님의 분명한 성품을 안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내용과 형식의 관점으로 보면 표현된 형식으로 본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거나 버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게 없으면 본질도 사라진다.
사람들에게 때로 불필요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의 기적 내용과 의미만 새기고 형식은 버린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영으로 내게 다시 오셨다는 본질만 챙기고 실질적 재림은 없다는 식의 생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일들을 객관적 사실로 믿을 것인지에 대해 "당연히 사실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된 일들이 객관적인 사실과 실재한 일이었다는 걸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그 사실들 속에 있는, 아니 그렇게 표현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인 기적을 부인하고서 그 속에 있는 내용을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며 창조한 사람의 실체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관해서도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그 대표적인 일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실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본 사람들 중에 이미 재림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다. 이걸 부인하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말씀하셨다는 건 분명히 다시 오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에 관해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생각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도 재림은 없다는 식의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 재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기고 믿는 게 본질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분명한 실체적 사건은 있다.
본질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늘 내 심령에 오심이 재림의 본질이고 내용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재림이라는 약속은 확실히 실존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공중 재림은 그 이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시는 일이 본질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적합한 형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본질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를 실존적으로 창조하심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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