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80

성경은 객관적 사실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3. 22. 18:25 Writer : 김홍덕

(feat. 재림이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경을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경의 무엇을 믿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걸 믿는다. 그런데 이 영적 변화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는 데는 하나님의 실존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으로선 하나님을 신으로 검증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큰 기준으로 삼는다. 기적과 신비한 일은 신의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게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실존과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준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와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에도 늘 표적을 구했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운명에 대한 애착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고, 믿음이란 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의심과 믿음에 관한 생각은 성경에 있는 내용들, 그것도 기적과 신비한 일들이 실재 사건이었는지를 검증하게 한다. 그래서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모임도 있다. (1981년 설립) 그뿐 아니라 인공위성으로 노아의 방주로 보이는 사진이라면 언론에 공개된 적도 있고, 지구의 자전 주기를 역산하면 히스기야가 해를 뒤로 물린 시간과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해가 멈춘 시간을 합한 시간만큼이 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신비하고 기적적인 사건이나 기록들이 어떻게 하다 과학으로 증명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을까? 또 지금은 인공위성과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실시간 중계가 되고 있고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므로 훗날 예수님이 공중 재림을 하실 때 실시간 중계될 게 틀림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땅에 완전히 착륙하기 전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까?

 

나는 장담하건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건 줄탁동시 같아서 내 밖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내 안에 연결고리나 가치관 혹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거의 망했고, 사회주의가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다는 게 완전히 증명되었지만, 자기 형편과 가치관과 생각을 사회주의에 투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봉하는 것과 같다.

 

이를 정리하면, 사람들은 기적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기적과 신비한 일들의 사실성, 실존적 증거를 찾아서 그걸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만 막상 그런 사실이 하나님을 믿는 동력이 되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유익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예수와 성경을 믿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먼 나라 역사와 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기적이 있었다는 걸 탐구하여 믿는 식의 믿음은 시간상으로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다는 성경 기록의 사실 여부고, 또 하나는 종말론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에 관한 믿음이다. 사실 후자가 더 믿기 어려운 일이다. 통계적으로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높은 확률을 가졌다고 해서 다음에 또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과거 기록이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미래를 사실로 단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역시 재림과 종말론이 그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객관적 사실을 믿는 믿음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은 객관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무시할 수준인가? 그건 또 아니다. 본질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하는 게 중요한데, 본질은 객관적 사실과 말 그리고 표현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기본 원리다. 영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객관적, 과학적으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형식 있는 존재가 아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정체성이 이를 대변한다. 더욱이, 아니 이런 하나님의 정체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객관적 현상과 실존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해 물리적 세상과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씀과 물 위를 걸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들은 모두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선 믿기 힘든 수단이나 방법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데 뭘 못하시겠는가? 다만 우리는 그의 행하심이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상고해야 한다. 중풍 환자를 고치셨다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는 '내게 그런 능력이 있으니 나를 믿으라'는 게 아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육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상태를 바로 잡으신다는 걸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시는 근원적인 방법은 현실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좀 더 설명을 이어간다면, 객관적 사실의 대표인 육신과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표현된 형식이다. 당연하게도 내용과 형식 중 본질은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형식이 없다면 내용을 인지할 수 없고, 인지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형식이 없다면 내용이 무의미해진다. 본질이 무엇이냐는 논한다면 당연히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을 배척한 내용은 또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셨다면, 사람이란 육신을 가진 존재는 필요 없다. 이런 하나님의 분명한 성품을 안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내용과 형식의 관점으로 보면 표현된 형식으로 본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거나 버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게 없으면 본질도 사라진다.

 

사람들에게 때로 불필요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의 기적 내용과 의미만 새기고 형식은 버린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영으로 내게 다시 오셨다는 본질만 챙기고 실질적 재림은 없다는 식의 생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일들을 객관적 사실로 믿을 것인지에 대해 "당연히 사실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된 일들이 객관적인 사실과 실재한 일이었다는 걸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그 사실들 속에 있는, 아니 그렇게 표현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인 기적을 부인하고서 그 속에 있는 내용을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며 창조한 사람의 실체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관해서도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그 대표적인 일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실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본 사람들 중에 이미 재림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다. 이걸 부인하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말씀하셨다는 건 분명히 다시 오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에 관해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생각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도 재림은 없다는 식의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 재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기고 믿는 게 본질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분명한 실체적 사건은 있다.

 

본질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늘 내 심령에 오심이 재림의 본질이고 내용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재림이라는 약속은 확실히 실존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공중 재림은 그 이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시는 일이 본질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적합한 형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본질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를 실존적으로 창조하심과 같이.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회색 성경) 예정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20. 20:24 Writer : 김홍덕

죄 사함의 집합에는 예정론이 있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특정돼 있다는 식의 생각인데, 예정론이 이런 법이라면 죄 사함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굳이 어렵게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정은 개인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a man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예정이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의 특정이 아니라 사람의 창조 목적에 관한 예정

 

예정론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로는 로마서 829, 30절에 나오는 '미리 아신 자', 에베소서 14, 5절에 '창세 전에 택하사', 요한복음 644절의 '하나님이 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 사도행전 1348'영생을 주기로 한 자는 다 믿더라'라는 말씀들이 있다. 행간을 읽지 않고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예정론은 단지 사람에게만 정해진 것도 아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개념도 나온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핍박받을 때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위해 성(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했다.(4:28) 교회를 향한 뜻도 예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을 향한 뜻을 분명히 예정하셨다. 하지만 그 예정은 개인을 특정한 예정이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에 관한 예정이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다.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바라시는 뜻, 그 하나다. 이 뜻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앞서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먼저 로마서 829, 30절에 나오는 '미리 정하신 자'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리 정하신 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순종한 사람이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 표상을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건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의 모습과 정체성에 부합한 사람이 바로 미리 정하신 자다.

 

하나님이 예정한 건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어쩌면 예정론을 오해하게 한 에베소서 14, 5절의 창세 전에 정한 사람은 건축에 있어 어떤 집을 짓겠다는 주인의 마음 같은 것으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자 정체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건 온전한 사람의 모습, 성품, 정체성이지 특정 개인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목적인지 순종하면 바로 예정된 존재가 되는 법이다.

 

이어 요한복음 644절의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로 올 수 없다는 말씀과 사도행전 1348절의 '영생을 주기로 한 자'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무엇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미정인 상태에선 구원이 없는데, 그 기준이자 표상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의 영생을 주기로 한 자 역시 특정한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로 했다는 게 아니라, 누가 영생을 얻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너무 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주기로 한 자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영생을 주기로 한 자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사람이 바로 예정하신 사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정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예정이라면 그 예정은 곧 우리 구원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갖고 창조한 존재며, 그 목적은 곧 예정이기에 우리가 그 목적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이고, 그 자리를 벗어난 상태는 죄다. 따라서 자리의 회복, 예정하신 존재로의 회복이 바로 죄 사함이다.

 

성경은 이 회복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얻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무의식적 믿음처럼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는 게 아니라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으로만 된다. 그렇게 바뀌는, 거듭나야 하는 생명,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 > 회색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 성경) 죄 사함 - 2  (0) 2025.03.19
(회색 성경) 죄 사함 - 1  (0) 2025.03.18
(회색 성경) 죄  (0) 2025.03.12
(회색 성경) 선악과 - 3  (0) 2025.03.05
(회색 성경) 선악과 - 2  (0) 2025.03.0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회색 성경) 죄 사함 -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9. 14:00 Writer : 김홍덕

죄 사함은 인생의 목적 회복

사람들에게 죄 사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회복이라는 게 생소할 것인데 이유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죄를 존재가 아닌 행위적 측면으로 확신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생의 목적을 자기가 정하기 때문인데, 그마저도 종국에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백한다는 건 그나마 솔직한 인생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 존재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보여 주셨다. 그게 보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로 인해 사해졌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십자가는 그리스도 구원의 핵심이라는 걸 안다. 십자가로 인해 모든 인생이 구원을 얻었다. 이건 명백하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십자가의 의미도 달라진다. 잘못되고 범법한 행동이 죄라고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단지 형벌이다. 죄는 내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은 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건 기독교의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고착된 사람의 생각이다. 일반화된 이 교리는 늘 '수천 년이 지난 오늘 내가 범하는 죄를 미리 아시고 미리 사하셨단 말인가?'라는 도전을 피할 수 없고, 그 도전은 자연스레 '그렇게 미리 속죄할 게 아니라 죄를 예방하면 되지?', '하나님이 그만한 능력도 없는가?'라는 외통수에 걸린다. 그러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법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다. 온전하신 하나님 아닌가?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건 우리 대신 받는 형벌이라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이끄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존재 목적이 그 모습이라는 걸 깨닫는 게 회개고 구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처럼 자신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모세 시대에 놋은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놋으로 만든 뱀을 볼 때 구원을 얻는다는 건 자기 모습이 뱀과 같이 하나님이 되려는 존재라는 걸 발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의 표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과 달린 모습 그리고 부활과 승천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회복해야 할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의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란 뜻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회복할 정체성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로 나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이 회복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가 사해진 것이다. 이건 다시 회개할 필요 없는 온전한 관계 회복이다.

 

죄 사함을 이렇게 온전히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의 회개는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고, 하나님께서 다시 죄를 생각하지 않는 흠 없고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이탈한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더 이상의 회개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만약 이게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면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가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렇게 죄 사함이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걸 알면 발을 씻는 것과 몸을 씻는 것의 차이도 분명하다. 이건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법을 설명하고, 또 어떤 회개를 할 것인지도 아울러 설명한다. 정체성의 회복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사람이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건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이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그의 삶의 본질이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 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아들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끊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유전적으로 그럴 수 없다. 이런 완전한 회복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얻는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여 돌이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단번에 드리는 제사요, 모든 죄를 도말하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아 살아가는 죄라고 하심을 알고, 그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로 안다면 우리는 다시 회개할 일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죄 사함은 바로 이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함이고, 구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위를 보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이 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걸 상기시킨다. 행위로 인한 죄책감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 않는가?'라고 염려한다. 심지어 '이건 구원파의 논리인가?'라고 걱정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염려를 미리 아셨다. 베드로가 발 씻기기를 거절할 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목욕했다는 건 성경적으로 정결케 했다는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결은 존재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란 죄 사함은 더 이상의 회개가 없다.

 

발을 씻는다는 건 행동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걸 비유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불변적인 유전적 관계는 목욕한 정결이고, 아들이 이런저런 행위로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이 행위로 지은 불순종으로 아버지와의 불변적 관계를 헤칠 수는 없다. 그런 법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들로 거듭나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럼 아들이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악행을 범해도 되느냐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으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도둑질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걸 일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낮아지는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악행은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생명은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가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은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나기만 하면 악행을 저질러도 되느냐?"며 질문하고, 염려한다. 이건 아주 확실한 증거다. 진정 자기가 거듭난 사람인지 가늠하는 증거다.

 

발만 씻으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 삶을 살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불순종에 대해 회개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부족했던 것, 미흡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을 돌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존재에 관한 회개가 아니라 좀 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난 죄의 회개와 전혀 다르다. 거듭난 삶을 살아보면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범했는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게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어떤 회개를 해야 하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모습이라는 걸 알고, 그 모습이 나의 인생이 되기를 고백해야 한다. 그게 죄 사함이고 온전한 구원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 > 회색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 성경) 예정론  (0) 2025.03.20
(회색 성경) 죄 사함 - 1  (0) 2025.03.18
(회색 성경) 죄  (0) 2025.03.12
(회색 성경) 선악과 - 3  (0) 2025.03.05
(회색 성경) 선악과 - 2  (0) 2025.03.0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