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앙의 아이콘, 가룟 유다

Category : 말씀과 삶/복음 담론 Date : 2026. 11. 2. 19:32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룟 유다는 압니다. 그는 인류 모두에게 배신의 아이콘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신앙적 의미는 단지 배신자만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어떤 신앙, 그것도 하나님께서 배척하는 어떤 신앙의 상징입니다. 가룟 유다의 가치는 배신자 프레임보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어떤 신앙의 반면교사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신앙은 그 자체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사실 가룟 유다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12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나안인 시몬처럼 12제자를 열거할 때만 나오는 이들보다는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언급은 캐릭터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의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를 상징하는 3가지는 예수님을 한번도 주(Load, 퀴리오스)로 부른 적이 없다는 것과 향유 옥합 사건 때 가난한 자에게 팔아서 주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던 것, 그리고 회개 아닌 후회로 자살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어떤 신앙’은 바로 앞서 열거한 3가지 중 두 번째,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이건 언뜻 사회 정의에 관한 것 같지만 그런 사회 운동이라는 관점이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며, 무엇을 하는 존재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아까워하며 ‘300데나리온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자’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비난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일갈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이은 가롯 유다의 행동입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가룟 유다는 그 길로 나가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버립니다.(마가복음 14장) 이 장면이 가룟 유다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이유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성경에 존재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으로 믿는 신앙을 들추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은 그 아들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기대했기에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구도화 하면, 속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라는 두 그리스도의 대립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은 그 아들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의 아이콘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믿는 신앙은 모두 가룟 유다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아니 어떤 신을 믿는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의 정체성과 우리 믿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행위를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가난의 해결이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이 존재의 하나님과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정체성과 뜻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육신의 복락과 평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공식에 수렴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순교한 모든 사도는 그 공식을 벗어나 저주를 받은 것이 됩니다. 이게 맞을까요? 육신의 평안과 복락은 하나님 은혜의 한 단면이지 공식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세상에서 평안과 복락을 주시는 것, 육신의 문제가 해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직임이고, 메시아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신앙의 아이콘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자 바로 예수님을 종으로 취급하고 팔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반대쪽으로 깨닫아서 그렇지 그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걸 가장 먼저 인지한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든 유대인이 예수님이 자기들을 로마의 속국에서 독립시키고, 가난과 질병을 해결한 유토피아와 같은 이스라엘을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랬기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와 “찬송하리로다”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나마 행동하는 바나바를 선택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가룟 유다와 같은 신앙,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 본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가룟 유다의 계보를 이은 신앙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육신의 문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인이 아주 많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2가지 고려 사항이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도 구원과 거듭남 이전에 육신의 복락을 먼저 하나님께 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과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게 잘못된 것이냐는 반문입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그 전에 본질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일단 구원을 받는다는 건 육신의 문제와 삶의 곤고함에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삶과 가치관에서 부터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죄, 잘못된 행동과 행동으로 악을 행하는 것에 관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나의 <행위>에 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반복되는 신앙안에 있다면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즉 이런 신앙 안에 있다면 육신의 복락과 평안, 즉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가난으로 말씀하신 삶의 문제 이전에 구원에 관한 묵상부터 바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육신과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라는 뜻인 말씀이 내 육신 곧 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내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나는 그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게 본능인 생명이 되는 게 거듭남, 곧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게 구원이라면 육신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순종하고 즐거워하는 상태와 삶일 때 나에게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유함도, 평안함도, 또 험난함이나 병약함이나 가난함도 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는 데 순종하고, 세상이 보기에 힘들고 없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있다는 믿음에 즐거운 삶이 하나님 아들의 삶입니다.

 

만약 이런 온전한 구원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평안과 복락이 하나님 손에 있으니 그걸 구하는 신앙 세계라면 가룟 유다나 호산나 외치다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이걸 돌아보지 않고, 가룟 유다를 마냥 배신자로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으로만 대한다면 나의 신앙을 돌아봄이 없는 교만한, 또 착각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룟 유다’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의 대표 주자이자 그 신앙의 아이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 배신의 대가만 상기할 게 아니라, 오늘 나의 신앙, 나는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와 그리스도로 믿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라면, 어쩌면 구원부터 구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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