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사실 이 로마서 5장 서두의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나니’라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곤고함을 환난이라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면 신앙과 삶이 연단이 되고 그 연단의 과정을 거쳐 자기가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쓴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에 대하여 오해가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망은 인생의 존재 이유에 대한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렇게 갈망하던 자기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 삶의 모든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가서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던 그 신앙의 프레임 안에서 소망을 봅니다. 육신의 곤고함을 이기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보면 그 곤고함을 이길 힘과 삶을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열쇠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이 소망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에 있어 목적은 예수님이나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문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 해결의 답이 예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소망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문제나 해결해 주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차를 삽니다. 그리고는 세차도 하고 기름도 넣고 정비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차를 산 목적을 위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동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차를 삽니다. 자기가 가고 싶을 때 편안하게 가기 위해서 또 빠르게 가기 위해서 차를 삽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름을 넣고 그 목적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세차도 하고 정비도 합니다. 그런데 차에 기름 넣어주고 세차해주고 정비해 주려고 차를 사는 사람을 본적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을 먹이고 입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육신을 주신 것도 괜히 육신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두심으로 사람이 육신의 한계 안에서 자기 생각을 이루지 못하여 겪는 곤고함을 만드시고 그것에 신음하고 어려워서 하나님을 찾으면 인간의 능력 이상을 자랑하시며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재미를 느끼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그 존재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없기에 그 영광과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할 형식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무형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고 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육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육신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을 이동을 위하여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이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겪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하신 것은 미물의 생명도 아끼신다는 것에 한정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 생명을 귀히 여기셔서?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파리처럼 죽인 사람이 몇인데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시려는 목적을 가지셨기에 먹이시는 것이지 그 생명이 귀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인생의 본질을 두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안목은 육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 알고 보면 그 문제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 그 세상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강제하는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편히 일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새벽 일찍 나서야 하고, 또 매달 염라대왕처럼 날아드는 카드명세서, 각종 고지서에 맘 조리는 일들, 그리고 자신이 계획한 사업이나 취업이 되지 않는 일, 그리고 원치 않는 건강의 악화나 사고와 같은 것을 환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육신으로 살면서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 반하여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일어나면 다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인생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인생이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선함이고 소망이라면 우리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여 삶을 시작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나 우리 인생이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어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내어야 하는 존재의 목적과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데, 그 소망의 실체이자 그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바로 환난이고 인내를 요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소망으로 두는 것과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기에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환난도 겪고 인내하여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본성과 신념의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이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겪는 곤고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아플 때 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에 경제 한파가 닥쳐도 예수 믿고 교회에 충성하는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신앙의 최상위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육신의 존재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대한 관점과 안목이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평안하고 원하는 일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소모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인생을 살면서 육신을 때 빼고 광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나 성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이 육신은 어디까지나 소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소비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드러내신 것에 그 육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소망이 있다하고 예수님을 믿노라 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이 육신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고자 하면 이 육신은 언제나 종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니, 십자가의 도와 같이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면 이 육신은 끊임없이 수고, 항상 천하게 되며, 항상 죄인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피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연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어가 산란을 위하여 알래스카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 회귀로 인하여 연어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연어들은 그 길을 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본성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그것이기에 그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 자기 소망인 것입니다. 연어가 신념으로 알래스카까지 가려 한다면 그것은 아마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연어가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연어라는 DNA가 그렇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소망인 사람, 하나님의 의와 십자가의 도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육신이 겪는 모든 것을 다 소망 아래 둡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 같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여깁니다. 십자가의 도가 자신을 그렇게 이끌고 가는 것을 스스로 봅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아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든 것이 운명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그 소망이 그 삶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하신 예수님도 하늘의 천군을 불러 이길 수 있었음에도 끌려가신 것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생명이고 본성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예수님을 그렇게 이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셨기에 아프시고 죽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었기에 육신을 그렇게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소망으로 두는 사람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인생의 곤고함을 이기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소망하기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었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그 인내가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소망인 사람만의 본성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할 때 숨차지 않겠습니까? 좋아하기에 더 많이 뛸 것이기에 더 숨찹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숨차지 않고 축구하기를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 하겠습니까? 숨차더라도 축구를 하는 것이 소망이겠습니까? 


그와 같이 이 육신의 삶에 속한 모든 곤고함과 사람들이 환난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 안에서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인내고 그 인내를 가졌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것이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신령한 은사를 누리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