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자신에게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혹은 신에게 계시를 받아서 알게 되는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거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업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지구가 언제 멸망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 계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원이나 영발 있는 사람에게 기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계시는 그런 것과 전혀 다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육신의 축복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시는 진정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계시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성도의 기업과 그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성경의 내용들이 상용화된 것 같은 세대입니다. 성도라고 하면 그냥 교회에 다니면 성도가 되는 것이고, 복음이라고 하면 신약시대에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면 다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 이후에 성경을 읽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상용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편리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알고자 하면 그때부턴 모르는 것이 다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신학을 비판합니다. 성경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공부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공부해서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 성령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도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있다면 신학 공부하여 얻은 자격증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하고, 육신의 평안과 안녕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있다면 분명히 그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육신과 심령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취득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서 자기 안에 넣고 축적해서 그것을 다시 꺼내어 놓는 지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습득한 것을 자기 안에 축적했다가 그것을 꺼내어서 지혜와 계시라고 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을 다시 자기 안에 넣는 것을 성경에서는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라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의 전하신 바를 보았을 때, 자기 심령이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임을 알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공부와 같이 자기 안에 축적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지하였을 뿐인데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말씀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계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인생의 정체성과 목적으로 순종하면 그 말씀이 순종하는 사람의 심령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주는 눈과 마음과 머리로, 보고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밑에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는데, 그 장면이 삼위일체의 역사하심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보이시겠다는 뜻을 세우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버지의 의가 형식을 가진 육신으로 나타나서 그 뜻을 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백부장이 자기 안에 수용했을 때 백부장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형식을 가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이가 성령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세우고 표현한 뜻을 의가 형식이 된 아들이 표현하신 것임을 사람이 알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렇게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이 있다면 그 심령에는 이전과 다른 생명이 사는 것이고, 생명이니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있어 거하고 있는 육신으로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가 나타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심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정하심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성도이니 성도들이 그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뿐 아니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아니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이루어진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령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혜와 계시는 모든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형식을 가진 존재인 세상과 사람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예수님께서 몸소 그 표현된 형식인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의와 뜻으로 창조된 모든 육신들에게 그 육신 가진 인생이 어떤 목적 아래에 있는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인 진정한 지혜요 계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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