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에 속한다. 이는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주셨고, 이 육신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기 때문이다. 즉 이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가 신앙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온전하게 보신다. 창세기에서 심히 좋았다고 하심은 물론이고, 이 육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면 하나님은 결함이나 실수를 하신 분이고, 예수님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우리가 가진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은 온전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생각은 반대다.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노력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든 미신을 믿는 것이든 모두들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늘 노력한다는 것이 자신을 부정하게 보는 것이고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온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감사할 것이지만, 자신을 부정하게 여기기에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에 감사하고, 그런 감사를 하려고 간구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어도 충분한 논리다.
특히 육신의 고난에 대한 생각은 더 그렇다. 사람들은 육신의 삶이 곤고해지는 것을 재앙으로, 하나님의 징벌로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고난에 순종하셨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예수님께 자기 육신의 삶의 곤고함을 없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그렇게 해 주시리라 믿는다는 것이다. 이건 신앙을 떠난 논리의 모순인데 이런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어둡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의 고통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는데 사람들은 자기 육신이 고난에서 벗어나 평안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고, 그것을 연구했다는 신학을 한 사람에게 그 방법을 물으려고 매주 헌금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아들이심을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고난에 순종하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로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예수님과 무관한 존재가 된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친다고 해도, 또 자신들의 신앙 가치대로 추구하여 육신이 평안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회 칠한 무덤이고 선지자 노릇일 뿐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써의 구속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동질성과 접점과 무엇보다 방향성이 다른데 예수님의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시고,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인생을 소비하는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고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 육신의 삶의 소비가 인생들의 눈에는 고난으로 보이고, 또 육신이 쇠약해지고 수고하는 것이니 형식으로는 고난 같아 보이지만 정말로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되어 예수님께서 고난에 순종하심과 같이 우리도 육신으로 그와 같이 순종하면 장차 다가올 영광과 육신으로써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구속, 대제사장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그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