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인 십자가의 희생은 단번에 드린 제사라는 것을 사뭇 강조하는 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은 언제나 하나다. 멀티태스킹이 있지 않느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물건은 멀티태스킹이 그 목적이다. 아수라 백작이나 반인반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태어나고 존재한 이후에 바뀌는 것도 없다. 트랜스젠더? 그것은 밥을 먹지 않는 거식증과 같은 병이지 성정체성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과 레위 제사장 제사의 완성이다. 형식에 내용이 합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은 내용인 하나님 말씀 그 자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제물이 제단에서 불살라지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온전한 것이다. 당연히 그 제사를 드린 제사장은 예수님이니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온전한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모든 형식에는 단 하나의 내용 곧 존재 목적이 있으니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은 경우의 수가 단 하나다. 예수님의 제사를 단번에 드린 것이라고 하시는 증거고 이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변화들이 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이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냈고, 그로 인하여 이제 모든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과정이다. 그 결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은 그 모든 것이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이자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심판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 아들을 심판한 결과를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정체성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에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 가진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을 보이셨다. 세상 지으신 하나님 아들이 피조물들이 스스로 세운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순종하는 것에 육신을 내어주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다.
이것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이라고 하는 것은 등지고 있던 사람이 각자 앞으로 가는 것과 같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는 가치관, 의로운 것은 반드시 귀한 대접을 받아 높이 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더 이상 미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자기 존재 정체성을 깨닫는 구원의 모습이다.
이 차이가 비난과 환난으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또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과 형제가 되어 동정하는 자리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산업도 빼앗기게 된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 10:32-43)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의가 반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피라미드 위로 가야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낮고 낮은 십자가로 가야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말의 교차점도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들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 지속되는 일이다. 육신이 세상에 있고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비난하며 종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인내는 의지와 신념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생명이 되면 이미 그 본성이 그리스도와 같으므로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즉 언제나 “너 옳다”고 말하고 자기 육신의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뿐이다. 성경이 참으로 말하니 참으려 노력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사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 삶이 인내 자체다. 따라서 이 인내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며, 그것은 육신으로 살 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인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 육신의 수명동안 사는 것이다. 우리 삶을 사는 내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그 삶이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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