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기적과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서 배에 오르는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육지에 내리니 병자들이 몰려와 많이 고침을 받았다. (막 6:53-56) 

 

그 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성토하는 일이 발생했다.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었기 때문이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으면 안 된다는 장로의 유전, 곧 종교적 관습과 규례를 어겼다며 시비를 걸어 온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시비는 청결 논쟁은 아니다. 성결에 대한 논쟁이다. 행위와 육신이 깨끗해야 성결할 수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제자들은 성결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제자를 둔 예수님이 성결한 존재가 아니라는 시비다.

 

사람은 보이는 육신의 삶을 인생의 본질로 여긴다. 그리고 인생의 성패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평안과 풍요다. 따라서 육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인생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을 위한 행동 규례(칙)를 정한다. 결국 육신으로 사는 삶이 사람의 기준대로 성공하기 위해 정한 사람의 법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각종 종교적 규례와 징크스, 미신의 실체고 본질이다. 결국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추구하고 지키려고 스스로 규례를 정하고, 스스로 구속된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이렇듯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으라는 규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육신의 복락이다. 손을 씻듯 하나님 앞에 깨끗해야 행동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 생각에 대해 예수님께선 손을 씻지 않고 먹어서 사람이 더럽히는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든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막 7:15)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먹은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건 사람 속이 이미 더럽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형식인 음식이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말과 마음과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말과 마음과 생각은 사람의 의와 가치관, 즉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는 독립된 더러운 행동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삶에서 표현되고 비롯되는 모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하시고 이어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항상 ‘네가 누구냐?’와 ‘너에게 나(하나님)는 누구냐?’다. 어떤 존재로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냐 뿐이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성결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 누가 빵을 먹느냐가 성결의 기준이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성결이 아니라 하나님 성전의 떡은 성결한 사람이 먹는 것

 

이 말씀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모양을 심히 강조하고 있다. 주일날 돈을 내고 짜장면 먹지 말라는 것이나, 노래방 가지 말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 주일날 쉬지 않는 직장에 가지 말라 등등 이미 불문율 진리가 된 관습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그 많은 종교적 규례를 왜 지키는지 생각해보자. 내가 그런 존재여서 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지키는 존재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야 벌 아닌 복을 받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의무감 혹은 두려움으로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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