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결혼에 대하여 명령 아닌 권면으로서 자신과 같이 혼자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중요한 단서를 추가했는데 그건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므로 자기 은사대로 행하라고 했다. 자신처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나 그렇지 않고 결혼한다고 해서 신앙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은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굳이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하나님께 그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바울 사도의 관점은 이어진 미혼, 과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말씀에도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미혼, 과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 생활 유지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즉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음을 허용했다. 다만 부부가 갈라지는 것은 분명히 금했다. 이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혼 생활의 다양한 단계와 형태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말씀에는 중요한 기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때, 곧 복음을 믿기 시작한 시점이다.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자신의 결혼 상태를 가급적 유지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이 단지 결혼 생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유지한 여러 삶의 형태 속에서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상황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결혼에 관해 이어진 말씀은 다분히 이런 복음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말씀은 결혼에 관한 말씀이라 말하기보다 복음을 믿게 되었을 때부터 삶의 형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삶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더 복음적인 삶으로 바꾸려는 마음 안에 있는 ‘더 나은’에 대한 기준이 세상적이란 데 있다.
바울 사도는 심지어 자기 신분이 종인 상태에서 복음을 믿게 되었다면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다만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고,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신분 면탈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할례의 상태도 그렇고, 자기 이데올로기 역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종이라는 신분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개선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바울 사도는 세상의 신분이 종이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면 자유인임을 분명히 한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 7:21-22)
복음은 우리의 세상적 형편이나 신분을 바꾸기 때문에 복된 소식인 게 아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렇고 지금 바울 사도의 말씀도 그렇다. 복음 안으로 부르심은 육신의 형편 개선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알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게 하심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사람의 온전한 짝, 이것과 하나되어 순결한 연합을 이루는 게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말씀이 그렇다. 진정한 종은 자기 존재 목적 아닌 데 지배를 받아 그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삶이다. 바울 사도는 결혼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는데, 특히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같이 살겠다고 하면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라는 뜻을 잘 설명한다. 그리고 이건 단지 호적상 결혼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부로서 모든 정성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라는 이 말씀은 의외로 복음의 근간이다. 우리는 하나님 성품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부르심을 받는다.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의 다양함은 곧 하나님의 다양성이다. 이 다양성을 피조물인 사람이 거부하고 일반화된 모습의 신앙을 추구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영접한 종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면탈을 구하지 않았다. 주인 빌레몬은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오히려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가 있다면 자신이 갚겠으니 오네시모를 받아 주기를 청했다. 또한 굳이 육체에 할례를 할 게 아니라고 전했지만 할례당원인 유스도라는 사람과 함께 복음을 전했다. 디도에겐 할례 받지 말라고 했으나 디모데에겐 받으라고 했다. 복음을 엄격하게 전한 것 같은 바울 사도의 본심이 이렇게 곳곳에 드러나 있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라는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지만 예수님은 마주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주어진 육신의 삶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생명이다. 따라서 이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형편 대로 사는 그 삶이 복음을 위한 우리의 터전이고 배경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다는 것, 복음을 믿는다는 것, 부르심을 입었다는 건 육신의 형편을 세상 기준으로 더 나은 단계로 상향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주신 그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형편과 삶이라는 세상의 한 절에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지금 같은 삶의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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