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이후에도 많은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이 율법들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한다. 이 율법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 갈등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지금은 율법은 구약 곧 오래된 계명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오신 달력의 시각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고 지금은 거저 복음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그렇게 나뉘는 게 아니고, 율법이라고 거저 오래되고 이제는 복음으로 대치된 낡은 계명인 건 아니다. 율법이나 복음이나 모두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다. 구원의 여정에 있었다는 의미다. 율법은 다양하지만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오히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설명한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가 율법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의 본질이다. 따라서 구약 아닌 신약도 그대로 살면 살고(복 받고) 어기면 죽는 (벌을 받거나 재앙을 당하는) 말씀으로 여기면 그 말씀이 곧 사람에게 율법이다.
기본적으로 출애굽기는 우리 구원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애굽-광야-가나안> 이렇게 3단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광야 생활은 율법적인 신앙의 정체를 설명한다. 단지 시대가 Anno Domini 즉 예수님 오신 이후 시대를 산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복음이 되진 않는다.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 받고,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믿음은 율법이다. 복음은 육신이 된 말씀이 삶의 본성이 되어 결과나 신념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이건 아주 근원적인 차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말씀이든 <지켜야 한다>가 될 때 율법이 된다. 이는 신약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같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가 되는 순간 그 사람에겐 율법이 된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종교적 의식으로서 세례 문답식에서 거듭났느냐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했다는 하나의 이유로 거듭났다고 스스로 칭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말 안에는 분명히 "해야 한다"가 있다. 그 삶의 모든 게 율법 안에 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해야 한다", "지켜야 복 받는다"로 받는 성경은 신구약 가리지 않고 모두 율법
이렇듯 성경의 말씀을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신앙은 예수님 오신 이후 만년이 지난 시점이라고 해도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복음은 지켜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 곧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본성에 이끌려 사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말씀에 이끌려 사는 게 복음이다. 본능에 이끌려 사는 생명은 본성을 어떻게 할 수 없듯,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능과 같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을 율법적으로 대하고 있다. 설교도 잘 들어보면 결이 다 같다. 성경대로 살아야 인생이 순탄하다는 게 모든 설교와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 공부의 DNA다. 자신들이 모두 복음에 안정적으로 속해서 복음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율법의 삶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었던 광야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가 시키는 대로, 교리가 해석한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있다. 솔직히 이건 무당의 협박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겐 구약성경도 복음이다. 흔히 구약을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 하고 신약을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 한다. 모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겐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자기 이야기다. 구약성경의 율법들 모두 자기 이야기가 된다. 모든 율법, 언뜻 "~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는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면 그렇게 하게 된다는 뜻이다.
율법은 지켜서 그리스도가 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두 지킬 수밖에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에게 있어 성경은 자기 육신, 곧 육신의 삶이 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한 논리다. 따라서 율법을 하나씩 지켜서 의로워질 생각은 옳지 않다. 거듭나면 모든 율법과 말씀은 나의 삶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난 게 아니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다. 말씀과 삶의 차이를 연구하는 신학 같은 이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학문은 세상의 것이고, 복음은 세상에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책이라는 데 수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a Christ)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그리스도가 된다면 모든 율법은 자기 삶의 모습을 스케치한 말씀이란 걸 알게 된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인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오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육신이 된 사람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41) 금송아지 - 출애굽기 32장 (1) | 2024.03.04 |
---|---|
(출애굽기 39) 자기 본성에 관한 책임 (0) | 2024.02.20 |
(출애굽기 3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0) | 2024.02.16 |
(출애굽기 37-3) 여종에 관한 계명 (0) | 2024.02.06 |
(출애굽기 37-2) 남종에 관한 계명 (0) | 2024.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