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몇몇 부분은 상식과 과학적인 실증을 요구하는 사회적 습관에 완전히 반한다. 대표적으로 부활과 사람을 포함한 천지창조 등이 그렇다. 신앙인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이런 시각차는 신에 대한 믿음 유무다. 신,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실존 인정과 신앙이 기독교 신앙을 구분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류가 있다. 신을 믿느냐 아니냐는 기독교를 하나의 나라에 비유할 때 국경을 넘는 이념과 같다. 오늘은 그 경계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일단 그 경계를 넘어 정상적인 입국이 허용된 사람들, 즉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 세계 속에서 신성과 인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미 신을 인정했는데 그게 필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의외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졌다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회색지대처럼 흐릿하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일이 있는데, 바로 새한글 성경이라는 성경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된 일이다. 39명의 학자가 12년 동안 연구한 결과라는데, 아직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튜브에 문제점을 지적한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탈색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산상수훈으로 새한글 성경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복을 베푸시는 주권자가 아니라, 어떤 이치를 따르면 복을 받을 거라고 조언하는 사람에 불과하게 묘사되었다. (새한글 성경에 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어쨌든 기독교는 자기 존립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 분이어야 하는데도 성경을 그따위로 번역할 정도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개념조차 없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더 나아가 이런 무개념 속에 빠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새한글 성경이 이를 아주 선명하게 해 주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란의 핵심은 <십자가>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보면 분명 신이지만,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끌려가서 못 박히고 또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는 십자가 밑을 지나던 유대인들의 조롱,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라는 말 속에 잘 녹아 있다.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성은 어디 가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으니 그냥 죽어 버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왜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고, 유대인의 조롱처럼 왜 내려오지 못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신성과 인성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예수님과 형제가 되어야 구원을 얻는 우리는 신이자 사람인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신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인지 등의 파생적 논쟁을 낳았다. 만약 이 논쟁이 나와 무관하다면 생각할 가치도 없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기에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 우리는 그와 같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게 문제다. 본질적으로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지녀야 구원을 얻는다.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이유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져야 한다고? 이건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큰 저항을 일으킬 말이라는 걸 모르고 있지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영어로 a Christ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the Christ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모습이고 정체성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므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건 내가 예수님과 같은 개체가 된다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많은 사람 중 한 그리스도, a Christ가 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선을 긋는다. 사실 이건 아주 편리한 접근이긴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형제란 한 아버지의 의를 가진, 그래서 정체성이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분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구원을 얻었다면서 예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고 선을 긋는 건 모순의 극치다.
예수님의 신성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식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다>라는 것과 <우리도 예수님과 같다>라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과 다른 존재라는 믿음은 놀랍게도 기독교 대부분의 입장이다. 대표적으로 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다시 회개하는 게 그렇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모순에 대한 답은 "예수님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죄가 없지만 나는 살면서 죄를 범하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형제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건 모순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 다른 접근은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존재라는 시도다. 이는 사실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건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문제는 성경이 의도와 달리 간헐적으로 기적을 행한 과거를 빌미로 자신도 신성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접근의 대부분은 이단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단적 결론은 크게 자기도 신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이 도전이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에만 집중한다. 이 둘은 모두 성경의 의도를 벗어난 것들이다.
먼저 자기도 예수님처럼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접근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이건 뭐 너무 많은 사례가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소위 정통이라는 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기반에서 대응하면서도, 부흥회나 알 수 없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신적인 능력이 일어나서 암이 치유되거나 성령에 감동하면 그런 능력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상충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더 나아가 독려하고 있다.
이런 모순에서 허덕이는 이유는 신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는 존재라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신의 영역이다. 우리가 믿는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나 업적을 기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접점으로 사람과 하나가 되시려 하지 않는다. 다른 것 볼 거 없이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사람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 같은 하나님과 접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신과 만나는 지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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