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금부터는 선명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대충 믿는 성경, 그래서 회색 성경이라고 부르기로 한 몇몇 주제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처음은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들, 어쩌면 성경의 의문 전부일 수도 있는 몇몇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첫 번째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전에 있는 <땅>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 대부분은 개의치 않는 듯한데, 사실 성경은 시작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걸 사실로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믿음 안에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시작부터 있다. 창세기 1장 2절이 그렇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3절부터 천지창조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는 말씀은 1장 3절이다. 땅은 셋째 날이 되어 생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물을 모아 바다라고 하시니 뭍이 드러났고 그걸 땅이라고 하셨다는 건 1장 9, 10절이며 셋째 날이다. 그런데 1장 2절에 ‘땅’이 나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라고 분명히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안타까운 것은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이렇게 명확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기독교인들은 아무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문제라는 걸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보듯이 대책 없이 그냥 간다. 넓은 길로 가고 있는 다른 신앙인이 많으므로 그 수와 대세에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큰 곤란을 겪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안다고 착각한 탓에,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큰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다.
천지창조 과정에서 땅이 창조된 날은 셋째 날인데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나온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밀 없이 말씀하시고,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분이라는 걸 믿는다면, 이런 의문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어떻게 하는지 시험하시는 게 아님은 알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지를 논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의도를 아는지를 따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면 표현도 오해할 수 없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한다는 표현을 두고 세법은 재산 압류에 관한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법은 살림을 꾸려가는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겠다는 게 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표현을 물리적 세상 창조로만 한정한다는 건 표현에 매몰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표현에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게 세례와 침례다. 이렇게 표현을 엄히 따지면서 창세기 1장 2절의 표현은 의미만 받아넘기려 할까? 천지창조 둘째 날은 또 어쩔 것인가? 물을 만드셨다는 게 아니라 궁창을 기준으로 나누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눈다는 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처사 아닌가? 세례에 관한 표현처럼 엄격하게 하려면 창세기 한줄 한줄에 대해 엄격히 묵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지창조는 과연 물리적 세계의 창조 이야기인가?
천지창조를 이야기 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세상(세계라고 해도 좋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깊은 철학적 고찰은 큰 도움이 안 된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나에게 세상은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됐다. 내가 죽으면 세상은 끝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있었지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다.
시작이란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학은 늘 있고, 결혼이란 삶은 세상에 늘 있지만 내가 입학해야 내게 대학이란 세계가 열리고, 내가 결혼해야 부부와 가정이란 세상이 시작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공동체로 발전하기는 하지만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내게 구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이 그저 유대인의 역사나 신화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고 시작되는 천지창조는 단지 물리적 세상의 창조를 이야기하시려는 게 아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인식되는 과정에 관한 말씀이 천지창조의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게 본질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세례와 침례의 논쟁부터 해결하고 와야 한다. 자기만 세례 혹은 침례라고 하면 된다고 말할 값이라면, 천지창조 역시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 관한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이 정도 양심은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물리적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걸 믿어야 하는 변함없다. 다만 성경을 믿는다는 건 과학적으로 믿기 힘든 일이라도 실재했다고 믿는 걸 말하지 않는다. 믿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한 목적이다. 세상은 그 목적을 표현할 운동장이나 도화지로서 먼저 창조하신 것이다. 그 물리적 세상에 내가 태어나면서 세상을 인지했고, 그 세상을 혼돈 속에 살다가 하나님이라는 인생의 빛을 만나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의도로 주신 성경이 창세기고 천지창조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나'라는 한 개인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이 올바른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땅은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기 전 혼돈과 의문에 빠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 즉 불명하고 흐릿한 회색 성경을 믿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바로 혼돈하고 흑암에 쌓인 땅이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은, 사람
실제 성경 속 땅은 언제나 사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게 주기도문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과 같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변하면 땅의 모든 게 변하듯 하나님의 뜻에 사람이 순종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혼돈하는 땅은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를 알려는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일생을 살며 의미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죽도록 고민하고, 삶의 목적을 알려는 끝없는 갈증과 노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혼돈하는 땅이다. 신앙 세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함도 여기 속할 것이다. 결국 답이 없고 막막한 상태, 그게 바로 혼돈하는 땅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한 목적,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게 되는 빛이 비취면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다. 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게 바로 창세기고, 성경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도 전에 먼저 땅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보고,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어둡고, 의문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듯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천지가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늑대의 시간 같은 회색 신앙에 속한 혼돈하는 땅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다. 빛이 있는데 어떻게 의문이 있겠는가? 성경이 시작할 때 만나야 하는 빛을 만났다면 성경은 의문스러울 수 없다. 따라서 회색처럼 흐릿하게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다들 그렇게 믿으니 대충 따라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솔직해지자. 그건 구원을 얻지 못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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