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9-29) 아들의 권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 14:0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에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현대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종교와 정치는 하나의 개념 혹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종교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을 공공연히 말씀하신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어쨌든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결국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으시는 자리에서까지 그것을 말씀하심으로 죽음의 절대적인 빌미와 죄목이 되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을 주저하시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모든 이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신학(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적으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고 정의들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생각의 안목에는 문제가 있다. 신성과 인성, 이렇게 이분법적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성과 신성은 물과 기름처럼 다른 존재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신의 의도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난 존재, 즉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계획과 의)이 사람의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육신의 삶으로 표현된 분이시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무식하게 학문적으로 표현한답시고 한 것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의 신학자, 목회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데칼코마니 같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사람(여자)을 통해서 아이를 낳은 것과 같은 개념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죽여야 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나왔던 다빈치코드라는 소설도 같은 개념이고, 지금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신성 + 인성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성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데칼코마니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방식에 관한 것, 육신에 관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보이신 능력과 기적에 관한 것으로 인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행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어떤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로 낳은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아니면 십자가에 직접 못 박혀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또 1월 한 장 어김없이 십일조를 평생 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친 일이 없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육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자기 평생의 사업을 이어가는 것을 바라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 역시 그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역시 그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셨는데, 이 형상은 image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듯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데, 그 목적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 곧 이미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그 목적대로 사람이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 아버지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는 관계가 바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계(요 5:19)인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가 아버지의 의를 나타낼 때 아들이 되는 것인데, 아버지의 일과 의를 알지 못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들이라는 개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자기의 안목, 곧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안목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아들도 아니고, 어떤 능력을 기준으로 커트라인을 정하고 그것 이상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나타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들에 관한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듣고서 자신도 그 법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면 영생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우리나라에는 없는 완료형 시제를 사용했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이 보내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셨고, 그 말씀이 오늘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요 성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나타냄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기에 오늘 날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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