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또 언제나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을 믿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이것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교회(기독교)가 이것에 앞장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세상이 잘못 만들었고,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책임지시오”와 같은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신으로, 또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경영하신다고 믿는 세상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그것에 순종하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의 영점을 조정하고 보면 이곳에도 의문스러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죄와 같은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죄를 만든 것인가?’ 또 ‘사람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은 몰랐단 말인가?’와 같은 의문들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이 해결인 안 되니,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신다고 믿으면서 아이러니하게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부르짖는 신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당신이 만든 것이 잘못되었으니 똑바로 하시오’라는 말이 즐겁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세상을 주관하시는 신으로 믿는다고도 할 수 없는 행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를 만드셨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욥기의 시작부에 하나님과 사탄이 만나서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토의(?)를 하는 장면을 보자. 그 장면에서 사탄은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동의를 얻고, 또 하나님께서 그은 선을 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성경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사탄의 유혹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사탄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과 싸워 이기시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악이 대결하는 구도로 본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이분법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사탄도 마귀도 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온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상의 일부를 마귀와 악에게 빼앗기고 그 빼앗긴 세력에 의하여 창궐해지는 죄와 싸우는 정부군 정도에 불과한 신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구도라면 사람은 선과 악 중에서 어느 한 세력을 선택하면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사탄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탄도 그냥 두고, 죄도 그냥 두시는가? 싶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만드셨고, 왜 사람을 만드셨는지의 문제를 바로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도 사탄도 심지어 죄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를 터부시한다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고 무지며 어두움이다. 무엇이 죄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통치 이념, 곧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그 의(義) 아래 있는 사람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흑암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증빙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했다.(롬 3:9)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다르게 보면 죄 위에 있느냐 아래에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는 사람의 정체성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인데, 그 죄와 사람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사람이 그 죄의 영향력 아래에 종살이를 하느냐 아니면 죄를 다스리는 뭐랄까? 죄보다 더 높은 정체성에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인가? 사람의 정체성에 무관하게 이미 세상에 있는 죄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죄는 이 블로그에서 수도 없이 언급한 바와 같이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정확히는 어떤 존재라도 그 존재하는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다 죄인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씀으로 본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존재의 목적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시작은 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면서(이 땅에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즉 목적 아래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으로서의 의사 결정을 시작하는 그 시점이 되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삼을 것이냐 아니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람의 시작은 죄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알아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망각하고 사는 시절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바벨탑의 땅에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고,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흑암과 혼돈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도 죄를 자백하는 것,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삶에서 잉태되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해가 되려면 먼저 창세기 천지창조의 시간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 아니 ‘시작(the Beginning)’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창세기의 시작을 객관적인 시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시작은 한 개인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는 것을 이 블로그 창세기에서 설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 이전의 세상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하나님의 세계 이전의 삶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만드신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이 또한 무엇이 본질이냐 하는 문제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 곧 생김새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형상이 없으신 영이시라고, 그림자조차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도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도 하는 분이시다. 즉 그 가지신 의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나시는 의(義)의 본체이신 분이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이 몇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나는 순간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날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룰 가능성의 존재, 그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아직 그것이 자기 삶이 되지 않았을 때의 삶은 어두움이고, 흑암과 혼돈이며, 죄의 상태인 것이다. 아직 목적이 자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 훈이가 타지 않은 로봇 태권브이의 상태인 것이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까지 6일이 소요된다는 것이다.(‘6’은 사람을 상징하는 숫자다. 즉 사람이 6일째 창조되었다는 것은 6일의 여정이 지나서야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6일은 달력의 6일이 아니라 상태의 과정이라고 창세기에 언급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아직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죄 가운데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라는 명제 혹은 상태를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심으로 인하여 파생된 하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아마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며 뜻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목적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이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법정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법이나 기준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 간략하게 말한다면, 그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기준이다. 그것이 율법인 것이다. 그러면 이 블로그에서 성경을 시대적으로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달력의 흐름 같은 객관적인 시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이라는 객관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고, 그 이후에는 예수님과 성령님께 맡겼다는 것을 객관적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역시 한 사람 안에 있는 과정의 여정이다. 구약 성경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섭리고 또한 말씀이다.
그 수천 년의 역사나 천지창조의 과정이나 아브라함의 여정이나 그 모두가 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를 통한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긴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의 여정을 설명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달력의 흐름 같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부산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한 여정이 큰 것이 죄가 큰 것이다.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발버둥 치고, 그 안에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를 주장하는 삶의 많이 살았다는 것, 그것이 죄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것은 그런 삶이 회복되었을 때 그 은혜가 크다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적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서 살아가기 전의 여정이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할 때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죄를 시인하면’ 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존재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구원이고 회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를 왜 만드셨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 만드신 목적이 있으시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면서부터 그 목적을 이루며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그 목적을 이루어내기 전의 상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신 것이다. 상태의 자리를 물으신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몸의 어느 부분의 세포라도 다 같은 DNA가 검출되듯,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그 하나만 온전히 알고 믿기만 해도, 죄나 사탄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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