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요 14:11)’라는 말씀도 하셨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로 붙어 있고, 또 같은 생명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지만,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의 관계와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다르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 = 농부와 포도나무)?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농부와 포도나무는 하나의 개체는 아니다. 농부와 포도나무는 농부가 포도를 얻겠다는 의(생각)를 가졌고, 그것을 포도나무를 통해서 현실(상)화 하는 관계다. 즉 농부의 뜻을 포도나무(포도라는 생명)가 표현해 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하나님의 법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확증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농부와 포도나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농부가 가진 포도를 얻겠다는 그 의와 뜻은 포도나무를 통하여 구현(나타나는)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은데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그 사랑은 내 기쁨 ♬~”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뭔지도 모르고 부르는 노래 곧 찬양이 아니라 노랫소리일 뿐이다. 예수님은 왜 포도나무고 나는 왜 가지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기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에 대하여 경계한다. 이런 경계는 우선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육신이 예수님의 본질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경계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개체인데 그것이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 예수님의 정체성을 육신으로 보이신 기적과 같은 예수님의 공로를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보다보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과 또 자신과 같은 존재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을 터부시하는 이유는 바로 the Christ와 a christ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들 지식적으로는 Christian이라는 말이 a little christ라고 말하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만약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예수님과 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이 ‘아멘’이 될 것인데 사람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the Christ와 a christ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포도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고자 포도나무를 기르시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풀면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해 내는 목적으로 만든 사람이 그 목적을 잘 달성하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열매를 얻고자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존재 =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고, 아들이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삶이 포도요, 그것을 맺는 가지가 우리 유신의 삶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 곧 생명의 나고 자라며 표현되는 이 생명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인 것이다. 그것을 포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농부 |
열매에 대한 뜻을 가지신 분 |
열매의 정체성 = 포도(그리스도)라는 생명 |
농부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 = 아들, 그리스도 |
농부 이신 하나님의 뜻 |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심 |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 |
하나님의 아들 = 열매 |
하나님의 아들 |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 = 포도 열매 |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지이고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신 것이다. ‘포도나무’는 생명의 이름이다. 사람이 보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포도나무를 일컫는 생명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하심대로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모든 사람이 속한 세계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면 ‘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가 될 수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자신이 거듭나서 그 생명을 표현하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와 같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랑,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살아있는 생명 안으로 속하는 사람은 포도의 세계에 속한 포도나무이고 가지니 당연히 농부가 원하는 포도를 맺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포도를 맺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포도라는 생명은 포도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포도나무 가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라는 생명이 가진 모든 생명의 법 곧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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