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한다. '세상이 잘못되었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니 이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오늘 같은 주일이면 많은 교회들의 이른바 대예배 시간의 대표기도에는 아마 거의 빠지지 않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위한 기도는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로 동행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위한 기도는 엄청난 어폐(語弊)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영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은 보편적 신앙관에 대한 제법 심각한 도전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보자.
신앙의 근간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하나님은 무소부재(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하시며 그의 경영에는 실수도 부족함도 없으심을 믿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나를 또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만드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구원을 받은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수도 없으시고 그 경영하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세상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부족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자신의 의도하심대로 경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고 하나님께 이 사태를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항변이 있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분이라고, 또 추수 때 까지 가라지를 그냥 두시는 분이라고. 하나님은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산다는 사람들이 나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데 사람들이 나서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외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동안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신앙에 있어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또 어떤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죽게 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해야한다면 그보다 더 중한 기도가 있을까? ‘당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하소사,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보내신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로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로마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왕을 대신한 빌라도는 오히려 살리려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경영하는 세상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세상이 그보다 잘못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죽는 상황보다 잘못되었는가?
세상은 잘못된 것이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그 경영이 온전하다고 믿는다면 세상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어야 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데 그 분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 뭐하는 거야? 일 똑바로 못해?”라는 항명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오히려 그 기도를 하는 자신이다. 하나님이 틀리지 않았다면. 세상은 언제나 온전하다. 예수님을 못 박던 시절도 온전하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지도 외면 받지 않고 온전히 이루어졌고, 세상의 종말이니 말세니 세기 말이라며 걱정하고 탄식하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경영에는 오류도 부족함도 잘못된 것도 고칠 것도 전혀 없다. 잘못된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그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망할 것이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거나,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지키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순례자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이 잘못되었고, 이 죄악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자기 가치관을 뉘우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이 물리적인 세상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를 말씀의 주제로 삼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과 세계는 이 세계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안에 형성된 그 세계다. 피사체가 주제가 아니라, 필름에 새겨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각 사람 그 사람이 가진 가치관으로, 그 안목으로 형성된 세계,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신앙의 세계고 창세기가 말씀하시는 태초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그 세계, 그 나라가 하나님의 의가 주인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각 사람 안에 형성된 세계의 주인이냐 아니냐가 바로 신앙의 세계고 믿음의 세계며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열려야 비로소 천지창조가, 빛이 있으라 하신 태초가 있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 형식에 매몰된, 육신의 문제, 세상이 속한 육신의 세계가 본질이고 그 객관적 세상 외에는 하나님의 의로 열린 거듭난 세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는 세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곳이 자신이 가진 가치 기준대로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자신은 그 세상의 지극히 작은 일부인데, 그 일부로서 세상이 자기 기준대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기준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은 항상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기준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이없게도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어두운 안목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려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기를 원하시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이 세상을 본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경영이 온전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 또한 온전하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경영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보일 것이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참고 계시다면 자신도 참을 것이고,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면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정체성을 가졌으니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이 자기 기준으로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끌고 가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에 순종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자기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가 심령의 본성이 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예수님과 같이 나타내는 삶을 살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 자칭 신앙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더욱 그런 것은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고,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이 하나님, 당신 정말 세상을 이 따위로 경영 할 꺼요?”라고.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세계의 의가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경영에 무조건 옳다 할 것이다. 그 옳다함을 인하여 자기가 십자가를 질지라도. 그게 신앙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십자가 외에 세상을 구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또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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