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쓴다. 그나마 이건 양반인데, 이슬람은 평소에도 눈 외에는 모두 가리라고 한다. 이런 종교적관습은 분명 성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이슬람은 신약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데 구약에 나오는 남녀에 대한 관점에 바울 사도의 말씀을 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유야 어떻든 당연히 천주교를 비롯한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의도는 아니다.

 

어쩌면 성경이 인류 역사에서 여성의 권익을 침해하는 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경을 바로 안다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런 어리석음은 모두 육신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과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 때문이고, 이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말씀이 있다. 이슬람이 코란으로 삼는다는 민수기 27장에서 슬로보핫의 세 딸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모세에게 청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신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정의한다.

 

무엇보다 근간이 되는 건 아담과 하와다. 그러니까 창조의 섭리 속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이다. 고린도전서 역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들의 행간을 잘 본다면, 그리고 성경의 전반이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중심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 이 모든 말씀이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육신의 복락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란 방식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이 형상은 모양이 아니라 image.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을 보면 삼성과 애플의 제조 철학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제조철학이라는 무형의 의나 정체성이 제품으로 나타난 것처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런 관계로 인해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신랑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구원이다. 이 하나님의 법은 남녀가 동침하여 자녀를 얻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아가서의 표현이나 우리를 모두 신부라고 하는 이유다. 이 법으로 인해 남녀의 창조 순서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창조의 법은 남녀의 창조 순서만을 뜻하지 않는다. 남자가 독처하는 게 좋지 않으므로 그의 배필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즉 남자에게 배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상 가진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을 창조하신 필연성을 말씀하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 말씀들을 연결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녀의 육신의 남녀를 말씀하시는 게 본질이 아니다. 의와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남자, 그 의와 존재 목적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여자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정체성이 남자고, 그 정체성을 표현할 육신 가진 사람이 여자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의와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남자, 그 의와 존재 목적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여자

 

그러므로 기도나 예언할 때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한 의미는 육신으로 여자는 예배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이라도 쓰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에서 눈만 제외하고 얼굴을 다 가리라는 이슬람은 자기들 종교 규칙이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한 건 아니다. 그냥 육신의 안목과 생각으로 만든 우상의 교시에 불과하다.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존재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건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것이다. 그건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외면하고 가리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건 구원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기도 하다.

 

또한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건, 그리스도의 의를 표현하는 육체는 육체의 생각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 의와 생각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그 의와 생각을 표현하는 형상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여자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애비라도 여자다.

 

또한 이런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일면 상대적이다. 더 말씀에 장성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이치가 여기서 비롯된다. 의에 대하여 더 장성한 사람이 바로 상대적 남자 역할이다. 앞서 말했듯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그 노력의 정도가 극한이라 해도 여자다.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것을 표현할 존재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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