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긴 이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존재를 보이신 이유와 연결되고 그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작용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것이 맘대로 해석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의미를 두시는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상호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호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이 표현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과 의와 뜻이 표현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과 목적과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의 정체성이고, 그런 삶이 아니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천지가 창조되기 전과 혼돈스러운 중에 그 혼돈을 이겨내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이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이 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삶의 첫 열매이자 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자 표현이다. 성경에 하나님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가 왜 없느냐 하는 사람들은 아들의 정의를 모르는 것이다. 아들이란 생식에 의하여 낳은 동일한 생명체를 말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어머니 어쩌고 하는 사고 방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들 삼으시는 법과 원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시고 사람이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서 어머니를 찾아서 아들을 낳는 그런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의와 뜻이 표현될 때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는 사람을 '아들 같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의와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되어 아들이 됨을 증거


아들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물과 피가 이를 증명한다고 표현을 했다. 물은 성경에서 율법과 말씀의 상징이다. 율법을 받은 모세의 이름이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고 모세는 홍해를 건넌 사람이다. 히브리인이라는 의미가 '큰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에서도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이 율법은 형식이다. 말씀도 형식이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문자도 형식이고 TV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도 다 작가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형식이다. 심청전의 모든 내용은 <효>를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로 대표되는 모든 말씀은 다 형식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 형식은 사람의 육신이다. 이 육신은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육신은 언제나 형식이다. 한 마디로 이는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 없이 형식만 지키고 말씀만 실천하려 하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의 삶 안에 채워져야 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목적은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고 이동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이종하지 못하는 자동차는 죽은 것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살아 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다. 다만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표현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정말로 기도할 때 자주하는 문구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피라고 한다. 피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기 전에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를 보고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신 것도 포두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식이 하나가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고, 요한일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7)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살을 보이심은 예수님과 같은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목적이고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삶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 육신을 가진 인생이 십자가에서 육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삶, 세상의 법과 경쟁에서 언제나 십자가로 가는 죄인이 되는 그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법과 같이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이김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믿고,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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