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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령 충만한 삶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8. 11:33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탁상공론이 아니다. 삶과 생활로 나타날 때 의미가 있다. 이건 물리적 형상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실존을 표현하시려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본 섭리다. 결국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에 수렴한다. 생명은 활동하고, 움직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런 게 없다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삶의 경건을 늘 소망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그 소망은 생명의 본능으로 성취되는 게 생명의 법인데, 노력하여 이루려고 하는 건 큰 문제다. 하지만 오늘은 성령, 성령께서 잉태시킨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이야기할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성령께서 이끄는 삶이다. '성령이 이끄는 삶',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말로 이를 많이 표현한다.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먼저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령이 임하셔야 하고, 임하신 성령이 충만해져야 한다. 끝으로 그 성령이 내 삶을 주관하여 인도하고 이끄셔야 한다. 이 모든 시작인 성령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는 앞서 간략히 이야기했다. (블로그의 다른 글에 성령에 대한 설명이 많이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성령의 임재에서부터

 

우선 성령은 기적의 아이콘이 아니다. 성령은 들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게 사실상 가장 크고 근본적인 기적이다. 성령이 이런 분이란 걸 알면 성경대로 산다는 게 노력이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성령을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시는 신비한 영으로만 생각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성령 충만은 곧 기적을 행하게 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겐 성령 충만과 기적을 행사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능력 행하는 데 자신이 없는 사람은 성령에 관해 무관심해지거나 그냥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을 뇌까리기만 한다.

 

성령은 또한 길 가다가 줍듯이 얻거나 받는 게 아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므로 그 생명의 본성에 맞는 자리에 임하신다. 우리가 집이나 사무실에 사용하는 물건도 대부분이 놓은 자리, 있을 자리로 공감하는 위치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정체성과 맞지 않는 사람의 심령에 거하실 리는 없다. 그런즉 성령이 임하시고, 충만해지려면 성령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에게만 임재하신다.

 

성령의 임재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다. 그리고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만나야 한다. 즉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이 임하시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기척이 있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한 게 아니면서도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는 알 수 없는 게 있는데 바로 자기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한 목적과 의미를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렇다면 '나를 찾고 찾으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인생의 목적을 찾으라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한다.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를 알려는 마음이 있다는 건 사람에겐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부러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찾지 않아도 정말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한다면 그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렘 29:13)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시겠다고 많이 말씀하셨다.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이기도 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은 결국 존재의 하나님, 존재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은 주로 인생의 문제, 가난과 질병에서의 해방이나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존재의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간혹 그런 것들을 찾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고, 버젓이 교회 강단에 서서 간증도 하는데, 단언컨대 그들이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은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하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학적으로는 모음을 기록하지 않는 히브리어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 즉 발음을 잊어버렸다고도 하는데,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이름의 뜻은 모세에게 잘 말씀해 두셨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더라도 그 부르는 존재의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면 존재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게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존재하는 목적과 가치와 시간과 의미와 실존을 모두 주관한다는 의미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우리 사람을 보면 이게 얼마나 큰 차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건 인지하지만, 존재의 목적도, 깃들어 사는 육신의 탄생과 성장의 원천을 모른다. 무엇보다 그런 것 중 어느 하나도 자기가 결정할 수 없다. 즉 그것들에 관해 주권이 없다.

 

스스로 있다는 건, 존재의 목적과 의미와 주권이 있다는 의미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는 말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성경 속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심령에 되새김질하면서 심령에 둘 때 성령이 오신다. 즉 자기 존재의 목적을 존재의 신 여호와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자기 존재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없던 사업자금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생기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령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셔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신다. 이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우리 생명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본성이 또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인 사람이다. 그의 모든 삶은 항상, 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다. 그리고 그 행함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려고 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정체성과 마음과 뜻이다. 한 마디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삶의 모든 순간은 성경대로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경대로 사는 삶이다. 이 블로그의 주제인 Bible become My Story도 이런 의미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이 삶이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며, 그 장성함이 곧 성령의 충만이다. 즉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냥 살 뿐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된다고?'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답한다면 그런 삶이 아니라면 거듭난 삶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에 관한 이야기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의 삶 모든 순간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게 당연하나 것이다. 개가 어느 순간만 고양이일 수 없다는 걸 동의한다면, 거듭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개가 잠깐씩 고양이일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한순간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여야 한다.

 

다만 자기가 그런 삶인지는 다른 이야기인데, 그것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양심이 화인 맞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는 게 곧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인정이 구원을 이룬다.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정한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자리를 떠난 것이고, 그것이 죄다. 그걸 시인해야 구원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은 구원받은 삶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아니라 구원 자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자기 안에 없다면 그건 구원받지 못한 삶이다. 사람으로 난 사람은 숨 쉬는 동안 항상 사람이듯이, 구원이 거듭남이라고 믿는다면 한순간의 예외도 없이 항상 성령이 함께하는 삶,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어야 한다. 이 생명이 없으면 행함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이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상식이다. 즉 항상, 어느 순간도 예외 없이 성경대로 살고 있어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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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령과 거듭남의 확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7. 12:46
성령은 우리를 말씀으로 잉태시켜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며, 우리가 성경대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아는 것 같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일부만 알고 있음에도 더 알려고 들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성령을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령은 지금까지 다룬 죄 사함, 구원, 거듭남을 확신하게 하신다.

 

사람들은 주로 기적의 아이콘으로만 성령을 인식하는 데, 그건 성령의 직임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성경 속 기적의 본질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 중 무엇이 최고의 기적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다.

 

성령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아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건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기적이다.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의 생명을 바꾸어 거듭나게 하시는 것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므로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다. 거의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하는데, 성령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의 심령 안에 있는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켜 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뜻하신 생명이 되도록 하신다. 이게 우리 구원의 법이므로 성령은 이를 이루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말씀 역시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우리 구원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씀은 곧 우리 역시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이렇게 생명이 바뀌면 크게 두 가지가 달라진다. 하나는 구원을 의심하고 부인하고자 해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고, 또 하나는 굳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이기에 그저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되며, 그런 자신을 보며 구원의 증거를 얻는다. 이건 사망이나 칼과 칼이나 마귀의 권세나 사탄의 유혹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생명의 본성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듯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변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대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병자를 고치고, 가난을 해결하는 하나님 아들의 본모습을 보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굽히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를 저지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시기까지 했다. 제자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전능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걸 이해할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고,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달아날 정도로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이 시대의 신앙인들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리라 믿었던 그리스도를 예수로 믿는다.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자기를 평안과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최소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믿었고, 그 믿음을 좇아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 순종의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니 제자들이 달라졌다. 독립을 이루고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영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구원을 얻었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건 생명이 바뀌었다는 걸 의미한다. 생명이 바뀌었다면 이제 바뀐 생명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산다. 그 생명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육신과 삶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삶의 모양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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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같은 구원과 죄 사함과 거듭남은 크고 큰 은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은혜인 건 아니다. 내가 확신하고 내 것일 때 은혜고 구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과 증거를 구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구원의 확신에 의심이 있다. 더욱이 그 마음을 말하고 표현하고 인정하는 건 더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감추기에 해결하기 더 어렵다.

 

구원의 확신은 마치 합격증 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의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은 아직 합격증을 기다리는 상황이므로 사실상 구원을 믿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믿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고 출근이나 등교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불안은 없다. 아울러 간절하게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 싶은 마음 역시 합격을 바라며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 같아서 확신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구원의 확신이 합격증 같다는 건 제법 적절한 비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합격증은 삶과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보다 언제라도 재직, 재학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회사와 학교의 법과 규칙에 따르고, 복지나 혜택을 누린다는 게 본질이다. 이게 성경의 표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건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사실상의 정답은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확신이다. 재직 중인 직장인은 구내식당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재학 중인 학생은 강의실이나 학적과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런 걸 의심하지도 않는다. 자기 존재의 확신 때문인데, 한 발 더 나가서 생각하면 그걸 믿으려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음을 북돋우는 신앙과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확신하는 사람, 아니 그런 걸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행동을 보고 정체성을 느낀다. 대학 캠퍼스에 앉아서 자기가 학생이란 걸 느끼고 감상하며, 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가 그 회사의 일원임을 느낀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과 말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느끼고, 이전과 다른 자기 삶에 놀라고 감사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 거듭남의 증거를 자기 심령 안이 아닌 밖에 있는 어떤 것에서 찾는 건 항상 불안하다. 나의 자아 밖에 있는 건 나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종과 같다. 예를 들어 방언이 구원의 증거라고 치면, 구원받은 방언과 사탄이 주는 방언은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또 어떤 기준으로 방언의 종류나 수준을 정할 것인지도 문제, 아니 논쟁거리가 된다. 즉 확신할 수 없는 요소가 늘 있다.

 

수가성에서 만난 물 긷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서 넘쳐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 본능처럼 있어야 한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은 어쩌면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어야 한다. 이는 구원과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으로 나고,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본성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야옹' 소릴 낼 수 없고,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잉태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과 역략과 감증과 증거를 가지고 자기 구원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야 구원의 확신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야,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있어야 구원이 확증된다. 생명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또한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 모든 건 생명의 법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나기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얻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된다. 결국 성령이 있어야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령께서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킨 사람은 성령이 심령에 계실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게 아니라면 성령이 계시지 않으므로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을 갈구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이 내재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므로 객관적 증거를 갈구한다.

 

반대로 성령이 내재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 본성이 삶을 이끌기에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과 말과 생각과 가치관에서 그리스도를 느낀다. 당연히 생명 본성이 이끄는 구원의 증거들은 부인하려 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사람들은 남자로 난 사람은 남자가 되길 갈구하지 않는 것처럼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 (고후 1:22)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는 결국 자아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자기 심령에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자기 삶과 말과 생각과 가치가 이전과 다르다는 걸 보며 자기가 거듭났음을 확신이라기보다 부인할 수 없음을 안다. 심지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자리에 이르러야 구원받은 상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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