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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21. 12:52 Writer : 김홍덕

왕의 권세를 업은 하만은 모든 백성이 자기에게 절하도록 하였으나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이기에 절하지 않은 것이라 하만에게 고하였다. 이제 이건 민족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문제로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니다. 유대,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로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서 하만의 행태는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은 것임을 설명했다. 아울러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고,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사탄(마귀)이라는 것 역시 설명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일이 그렇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에서 이겨 높은 자리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믿는 신앙이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라는 하만은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모습 그 자체

 

절을 한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상대의 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네가 옳다"라는 인정이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상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영광을 다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껜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일갈했다. 세상 영광을 주겠다는 말에 절한다는 건 세상의 영광이 영광의 본질이며 사람이 추구할 영광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 것이다.

 

모르드개의 모습은 기백 있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르드개로 인해 큰 위험에 빠지게 되는 유대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 역시 아니다. 이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모든 인류의 자세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삶을 살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창조된 존재다. 당연히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사와 가치를 찬양해야 한다.

 

모르드개의 일로 보면 세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상당한 핍박을 마주하게 된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보여준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의 권세를 등에 업은 하만에게 절하지 않아서 당하는 것과 같은 핍박을 당하게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가치에 순종해야 한다.

 

이후에 에스더를 통해 이 하나님의 가치를 지키고 순종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볼 수 있다. 에스더는 이걸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와 가치를 찬양하고 순종하는 건 세상의 큰 핍박을 받게 되나 하나님은 그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에스더서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종하고 찬양할 하나님의 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 우선 세상의 영광이 영광의 본질이니 추구하라는 시험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일갈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순복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려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가 거듭나서 얻어야 하는 새 생명의 본성인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란 게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생각)이 왜 사탄의 생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생각은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이고, 하만에게 절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찬양하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므로 사람에겐 그것 외에 수용하거나 순종해야 할 것이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의 유일한 신인 이유다. 모르드개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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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권세를 훔친 하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19. 21:09 Writer : 김홍덕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다. 왕후가 된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걸 숨겼다. 모르드개의 당부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문제가 생긴다. 아하수에로의 총애를 받게 된 하만이라는 신하가 정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자기를 위해 절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절하지 않은 이유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유대인이란 말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넷째 아들 유다에서 비롯되었다. 유다는 '찬송하는 자'라는 의미다. 찬송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하만 같은 사람에게는 절할 수는 없다. 하만에게 절한다는 건 유대인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렇다고 이 말이 육신의 혈통이 유대인인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육신의 혈통을 기준으로 구원을 정할 리가 없다. 이 간단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에스더서에 나오는 유대인이 우리 모든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게 성경의 본질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되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으니 다른 신을 섬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보여주는 하만의 태도는 옛날 오만한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인생을 자기 걸로 삼은 모든 사람의 태도다.

 

다음으로 갈등의 또 다른 축인 하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하만은 절대자인 아하수에로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신하다. 논리적으로 그는 찬양받을 대상이 아니다. 하만에게 절하는 이유는 아하수에로 때문이다. 호랑이와 함께 다니는 여우와 같은 지위일 뿐 사람에게 절을 받을 자기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지위를 망각했고,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

 

성경에 이와 아주 똑같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사탄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을 주관하면서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한 세 번째 시험은 이 오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 영적 존재인 사탄만 그런가의 문제다.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만류한 베드로도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사탄을 마냥 영적 존재로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사탄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 가치로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은 모두 사탄이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경영하신다. 하나님이 주인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도둑질 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주관하려 하니 도둑질이다. 또한 하만 같은 오만한 마음이다.

 

그런데 그게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면 다행인데 다른 사람에게 이걸 주장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하만이 자기 것 아닌 왕의 권한을 맡았는데, 그걸 자기 것으로 여기면 사람이 자기를 경배하게 했듯이, 사람도 하나님께 훔친 자기 인생을 자랑하고 남들에게 강요한다. 이 강요는 내가 옳다는 판단이 뿌리에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는 걸 사람들이 찬양하기를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그런 평가를 얻으려고 인생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옳고, 그 옳은 가치로 이룬 성과를 찬양받으려 한다. 모두 하만과 같은 자세다. 세상에서 성공한 걸 찬양받으려 한다.

 

사람은 높아지려 하고, 높아진 후에는 찬양받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절을 받으려는 하만의 자세다.

 

이런 사람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는 늘 핍박받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즉 낮아지는 본성으로 사는 걸 가장 귀한 가치로 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높아지려는데 낮아지려 한다. 이게 절을 받으려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모습이다. 다음으로 그 모르드개를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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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가 된 에스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11. 22:03 Writer : 김홍덕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킨 아하수에로는 신하들의 말대로 새로운 왕후를 얻는다. 왕정 국가에서는 후사를 잇는 건 중요한 일이다. 에스더서는 이 당연한 일에 우리 구원의 법을 입혀 설명하고 있다. 절대자의 배필이 되는 에스더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신부가 되는 우리의 길을 설명한다.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라는 의의 형식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존재 목적에 관한 말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와 의도를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성경은 육신의 성별을 기준으로 누가 더 의롭고 주관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책이 아니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언뜻 보면 성경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언컨대 성경이 그렇게 보인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사람이고, 성경의 행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시다. 영이라는 건 마치 짝사랑하는 마음과 같아서 존재를 알 수 없다. 말이든 행동이든 표현해야 상대가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형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맛보라고 우주와 만물을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성품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겸손의 성품도 있다. 이걸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게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건, 하나님이 사람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담아내는 그릇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우리 육신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육신의 남녀 또한 이런 법을 설명한다. 남자는 의와 능력에 치중하고, 여자는 외모와 형식을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할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신 법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역할을 주신 것이다. 이는 남녀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게 존재로서의 구원이다. 존재는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게 구원이다. 선수가 발로 차지 않는 축구공은 깨끗하긴 하지만 존재 목적으로 보면 멸망 당한 상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때 구원받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의와 뜻은 표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해야 하고, 그 말씀이 본성이 되어야 한다. 본성은 생명에만 있으므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성경대로 살려고 부단히 애쓰는 건 본성으로 살아내는 게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남녀의 관계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드는 게 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 2:19.20)

 

절대자의 아내 곧 왕후가 되는 에스더는 이런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에스더 시대에 아하수에로는 절대자다. 이방인의 왕에게 시집가는 걸 어떻게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걸로 비유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하수에로라는 육신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절대자라는 그의 상태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우리에게 절대자는 바로 하나님이다. 아하수에로에게 왕후가 필요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도록 만든 육신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때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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