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1:27-22:1)
나실인의 예식 기간이 일주일이 지나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체포하고서 "유대인들을 훼방하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럽혔다"며 그 이유를 외쳤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체포한 유대인들의 이유 중에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건 오해였다. 단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드로비모라는 헬리인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그런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모든 행동은 율법을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율법을 범한 바울 사도를 계몽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렇게 복음을 핍박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 했을까?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근본적으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율법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행위가 어떤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판단하고, 육신의 상태, 즉 지위나 경제 상태 등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지는를 판단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욥의 세 친구,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보이는 복음으로 인해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 자기들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한다. 고난받고 있는 욥을 보고서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한 결과라고 했고, 그 환난을 벗어나려면 무엇을 잘못 했는지(Do)를 돌아보고 행위를 회개하라고 독려했다.
율법주의의 이런 이면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에 미치는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로까지 생각하기에 더 두려워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 생각하니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인생의 불행은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행위를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더 나아가 행위로 쌓은 공로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축복의 대가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행위를 드리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래를 장사라고 일갈하시기도 했다.
복음을 핍박하는 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
사람은 상 받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벌을 받는 건 누구나 두려워한다. 상을 받아야겠다는 욕망에 빠진 게 아니라면 상을 받지 못하는 게 두려워 능동적 핍박이나 대응을 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고, 필요하다면 강요하고 핍박한다.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염려와 경각심은 이런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자녀에게 헌금을 떼먹는 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엄히 경계하며 가르치지만,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지옥 간다고 훈육하진 않는다. 잘하면 좋은 걸 하지 않는다고 두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의 복음 핍박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망하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육신이 아프면 안 되고, 사업이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고, 벌을 받는 건 본질로 보고 있는 육신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그 지경에 본성에 이끌려 가셨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런 본성이다.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게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두려움의 단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발을 씻기라 하셨다. 이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그렇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 두 사람이 있을 때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세상의 가치로 선한 걸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삶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의 발작 버튼이 누르는 일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앞서 설명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아닌 신약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율법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아니라고 착각한다. 육신이 세상 기준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반대로 망하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율법주의자고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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