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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8. 26. 10:20 Writer : 김홍덕

거짓말이란 실체와 다른 말이다. 거짓이란 게 근원적으로 실체와 다른 것이니 그걸 말로 하면 거짓말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사기꾼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짓말을 매우 싫어한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정의감이나 의로움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저 사람은 솔직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말도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 이걸 거짓말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말에 대입하면, “나는 사람을 상종하지 않겠다가 된다. 괴변이나 억척 논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 더 나아가서 약속이나 계약을 맺어가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다라는 말 보다 훨씬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이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말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성경은 언제나 말이나 행동이라는 종말적 표현보다는 그렇게 나타내는 근원과 원인을 주목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중심’, ‘속 사람이다. 더 성경적 표현으로 한다면, ‘()’. 또한 사람에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움이다. 사람은 결국 그걸 표현하는 존재인데, 그 의가 하나님의 의인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옳음인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분별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존재의 목적이다. 이건 늘 강조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상실하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목적대로 자기 모든 걸 소진하면 충성이 된다. 사람도 존재기 때문에 동일하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을 정하거나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의 의미를 찾는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당연히 존재 목적도 그만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그 목적을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다. 이건 사람이 알 수 없는 걸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은혜는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걸 해결해주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은 의와 존재의 목적을 기준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창조주의 의도 안에 있고, 그렇다면 사람의 존재 목적은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표현할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곧 하나님 아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과 거짓은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그건 거짓이란 존재가 존재 목적과 다른 걸 사실이라고 주장하거나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존재 목적과 다른 걸 표현하거나 의로 여기거나 주장하는 모든 건 사실 여부를 떠나 모두 거짓이다. 이게 바로 실체와 표현이 다른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자기의 실체와 다른 말을 한다면 그는 말뿐 아니라 그의 모든 게 거짓이다. 간첩을 예로 들어보자. 간첩은 잠입한 국가와 사를 전복시키려는 존재이며, 그걸 위해 수고하는 자다. 그런 간첩이 세금을 내고서 나는 세금을 잘 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사실인가? 아니면 거짓말인가?

 

간첩이란 신분과 무관하게 세금을 낸 행위라는 실체는 사실이므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존재 자체가 거짓인 사람이다. 간첩은 그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세금을 사용하는 국가의 의에 동의하지 않는 자다. 세금을 내는 행위가 거짓이다. 그런데 거짓을 구성하는 행위가 사실적 실체라고 말한다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 이런 게 사회에서 일부 지지를 받는 건 사실이지만, 근원적으로 존재가 거짓이면, 그 존재가 형성한 실체적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고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하는 건 심오한 괴변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당연히 하나님도 거짓을 싫어하신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앞서 예로 든 간첩의 사례에서 간첩이 세금을 내고서 세금 낸 건 사실이라고 말하는 걸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실까? 그렇지 않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은 존재 목적을 벗어난 사람의 모든 것을 거짓으로 여기신다. 우리가 아는 죄라는 말의 어원이 가진 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말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를 알 수 있다. 과녁을 벗어났다는 건 목적하는 바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3,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에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라고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즉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세상이 최고로 칭송하는 선한 행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거짓과 죄로 여기신다. 아니 그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삶은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거짓이다. 거짓말은 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존재로서 목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의 문제다.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거짓말도 하나님의 존재 목적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연장선 위에 있다면 거짓이 아니다. 사람이 참되므로 모든 것이 참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참으로 여기는 사람, 존재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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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17. 요나단의 믿음과 밝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8. 24. 09:48 Writer : 김홍덕

(삼상 14)

삼상 14장에서는 13장에서부터 이어진 블레셋과의 전쟁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승리는 요나단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는데 공로는 사울이 차지하는 모양새다. 프로야구에는 유명한 말이 많은데, 그 중에 “3루에서 태어났는데 자기 힘으로 3루까지 온 줄로 안다라는 말이 있다. 야구에서 3루는 선수 혼자만의 힘으로 가기 매우 힘든 베이스인데 자기가 거기 있는 게 자기 힘으로 된 것으로 착각한다는 비유로 자기 공로가 아닌데 자기 공로로 착각하는 사람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사울이 딱 이 모양이다.

 

전투는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부하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 앞에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시작됐다. 요나단이 그렇게 했던 건 그렇게 했을 때 블레셋 군사가 이리 오라고 하면 그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징표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요나단은 그 믿음대로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단과 함께 하시므로 블레셋은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그걸 멀리서 본 사울이 그 때를 노려 공격해서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와중에 사울은 허투루 하나님께 맹세하여 아들 요나단을 죽일뻔한다. 요나단의 믿음과 용맹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자 블레셋을 이길 때까지 아무도 먹지 못하게 하는 맹세를 해서 지친 병사들이 먹지도 못하고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한 요나단은 땅에 있는 꿀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져 더 용맹하게 싸운다. 그러나 블레셋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하자 사울은 그 이유가 맹세를 어긴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여 제비 뽑자 요나단이 뽑히게 되고, 자기 맹세대로 죽이려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요나단이 하나님께 함께 했다고 신원하므로 요나단은 살게 된다.

 

성경 속 요나단은 우리아와 같은 사람이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지만 영광을 얻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억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다윗과의 우정으로 유명하다. 사무엘 상 20장에서는 다윗을 죽이기로 한 사울에게서 다윗이 도망치도록 알려주며 둘이 헤어지는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장면으로 꼽을 수 있다.

 

사무엘 상 14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쟁은 오롯이 요나단의 전쟁이다. 요나단의 믿음과 용맹으로 이긴 전쟁이란 뜻이다. 블레셋은 철로 만든 병기를 가졌지만 이스라엘에는 사울과 요나단 둘만 철로 만든 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전쟁은 상식적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에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이 당황하게 하셨고, 땅을 흔들어 두렵게 하셨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힘만 믿는 아버지 사울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전쟁 중간에는 두 가지 특이한 일이 있다. 하나는 요나단이 블레셋에 잠입하면서 자기가 블레셋 병사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블레셋 병사가 블레셋 진영으로 오라고 하는 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로 믿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쳐서 꿀을 먹었는데 힘이 났다고 말씀하지 않고, 눈이 밝아졌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두 가지다.

 

일상의 평범함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징조로 믿은 요나단

 

전쟁을 생각해보면 적군이 눈 앞에 나타나면 오라고 해서 잡아 가는 게 당연한 이치다. 블레셋 병사들도 요나단과 그 심복을 보고는 숨어 있다가 기어 나왔다고 조롱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요나단은 너무나 당연한 걸 하나님의 징조로 여겼다. 이는 삶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관하심 안에 있다는 걸 믿는 믿음이다. 누구나 당연히 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사람들은 평범함은 하나님의 경영이라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어김없이 뜨는 것과 같이 일상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징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걸 믿는 징조로 기이한 현상과 비범한 일 그리고 기적을 바란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 우주가 운행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십억의 사람이 사는 세상을 경영하시는 일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렇게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아시고 늘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별식 같은 기적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놀라운 능력과 그 능력이 나의 삶을 보전하신다는 건 믿지 않으면서 기적으로 임하는 하나님만 기대하는 건 금도끼, 은도끼를 얻기 위해 자기 도끼를 연못에 던진 얌체 나무꾼과 같은 심보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또 다른 특이점은 지친 상태에서 꿀을 먹고 전투를 치를 힘이 났는데, 이를 두고 기운이 솟아났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힘이 났다고 하는 것이 상황에 맞고 일반적인데 성경은 눈이 밝아졌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유혹이나 세상을 이기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주로 능력을, 세상을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세상을 상징하는 이방의 대표인 블레셋과 싸우는데 꿀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져전투를 이기게 되었다는 건 무엇으로 우리가 세상을 이길 것인지를 말씀한다. 바로 올바른 인식, 밝음이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이다. 또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 물질이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는 건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떤 말씀과 지식과 가치관을 취해야 하는지를 구분하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상수도와 하수도를 분리한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방 블레셋과 같은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곧 밝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려 한다. 그래서 세상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부자 되게 하시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의학으로 고치기 힘든 병은 의학 이상의 신비한 능력이라는 힘으로 고치려 한다.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그래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갈라지듯 내가 먹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를 구분하는 것, 이것으로 세상을 이긴다. 그러니까 눈이 밝아져야 세상을 이긴다. 요나단이 눈이 밝아져서 블레셋을 이겼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다.

 

우리는 오늘 요나단에게서 우리 일상을 돌보시고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 일상의 여상함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믿는 믿음을 배우고,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힘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 세상을 또한 바로 볼 수 있는 밝은 눈이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요나단을 통해 이걸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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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8. 20. 09:13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이들, 아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거나 들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녹음기에 녹음할 수 있는 음향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음의 소리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말은 귀로 들을 수 없으니 타협한 변명이거나, 듣지 못하니 하는 핑계로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남의 본질을 안다면 그건 그리 좋은 의견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고, 생명이 바뀌었다는 건 본성이 달라졌다는 것이며, 이건 가치관과 안목과 생각과 인식 모두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 가져오는 본질적인 변화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릴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 되었고 그의 삶이 곧 하나님 말씀대로의 삶이 되었으므로 그의 마음 속에 이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자 말씀이며 뜻이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의 소리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

 

아마도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원리가 머리로는 이해해도 선뜻 자기가 그렇다는 걸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자기 안에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과 같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신앙인의 갈등은 언제나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라서 겪는 갈등이다. 하나님 말씀과 자기 생각이 다른 증거다. 자기 생각과 말씀이 같았던 경험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늘 구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내 육신이 되기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연히 기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이다. 이것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 또 성경이 언급하는 모든 기도는 우리가 <주기도문>이라 이름 붙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 있다. 주기도문을 벗어나면 그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그런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뜻에 관해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신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제대로 기도했다면 우리에겐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건 중요한데 하늘의 뜻이 땅인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나에겐 구원이 없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창조된 땅인 나에게 이루고자 하신 뜻은 당연하게도 구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만 들린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단계다. 따라서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필요한 건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단계다. 신앙인들 대부분은 이미 지난 단계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자기 육신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졌다는 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게 바로 이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제대로 거듭났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된 것이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 그러니까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본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 이는 생각은 당연히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며 음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의 생각과 뜻은 곧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며 음성이다.

 

이건 믿기 힘들고, ‘사람에게 과연 그런 일이?’라는 감탄과 의심을 자아내는 일이다. 그래서 믿기 힘들다. 아니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과 거듭남의 본질이 그렇다. 무엇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 은혜는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선물처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걸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늘 이미 주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어쩌면 변화산 위의 엘리야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일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음성이 우리 육신의 삶의 필요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그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 기대에서 비롯된 환청이라 말하고 싶다. 육신의 필요는 천부께서 이미 아시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땅인 사람에게 전해지는 음성이라면 그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자 음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건 분명 놀라운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기적처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늘 내 안에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거듭났다면 나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을 얻었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께서 그걸 본으로 보이시고 말씀해 주셨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4)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거듭남과 구원을 얻었다면 나의 생명이 된 하나님 뜻(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 들려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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