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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5 – 왜 복음을 핍박할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1. 07:29 Writer : 김홍덕

(21:27-22:1)

나실인의 예식 기간이 일주일이 지나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체포하고서 "유대인들을 훼방하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럽혔다"며 그 이유를 외쳤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체포한 유대인들의 이유 중에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건 오해였다. 단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드로비모라는 헬리인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그런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모든 행동은 율법을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율법을 범한 바울 사도를 계몽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렇게 복음을 핍박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 했을까?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근본적으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율법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행위가 어떤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판단하고, 육신의 상태, 즉 지위나 경제 상태 등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지는를 판단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욥의 세 친구,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보이는 복음으로 인해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 자기들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한다. 고난받고 있는 욥을 보고서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한 결과라고 했고, 그 환난을 벗어나려면 무엇을 잘못 했는지(Do)를 돌아보고 행위를 회개하라고 독려했다.

 

율법주의의 이런 이면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에 미치는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로까지 생각하기에 더 두려워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 생각하니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인생의 불행은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행위를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더 나아가 행위로 쌓은 공로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축복의 대가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행위를 드리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래를 장사라고 일갈하시기도 했다.

 

복음을 핍박하는 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

 

사람은 상 받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벌을 받는 건 누구나 두려워한다. 상을 받아야겠다는 욕망에 빠진 게 아니라면 상을 받지 못하는 게 두려워 능동적 핍박이나 대응을 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고, 필요하다면 강요하고 핍박한다.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염려와 경각심은 이런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자녀에게 헌금을 떼먹는 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엄히 경계하며 가르치지만,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지옥 간다고 훈육하진 않는다. 잘하면 좋은 걸 하지 않는다고 두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의 복음 핍박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망하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육신이 아프면 안 되고, 사업이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고, 벌을 받는 건 본질로 보고 있는 육신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그 지경에 본성에 이끌려 가셨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런 본성이다.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게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두려움의 단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발을 씻기라 하셨다. 이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그렇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 두 사람이 있을 때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세상의 가치로 선한 걸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삶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의 발작 버튼이 누르는 일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앞서 설명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아닌 신약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율법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아니라고 착각한다. 육신이 세상 기준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반대로 망하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율법주의자고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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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신앙인이 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한다. 때론 세상 유익을 구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기도는 어디까지나 간구다. 하나님께는 있고, 내게는 없는 걸 구하는 게 기도다. 창조주인 하나님께는 있고 피조물인 나에겐 없는 단 하나, 극복할 수 없는 그 절대적 차이 하나는 바로 피조물인 나의 존재 목적이다. 기도는 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구하는 기도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기도의 모든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유일하고 전부인 간구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사람이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유일하고 전부인 기도다. 그렇다고 주기도문을 뇌까리라는 건 아니다. 주기도문의 취지와 주제를 하나님께 구하라는 뜻이다. 주기도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존재 목적을 회복한 삶은 존재 목적대로 살게 된다. 그건 목적 있는 삶의 모든 걸 이루는 삶이다. 살면 사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어떤 기도를 했는지는 상관없다. 되돌아보지 않아도 십중팔구는 돈 달라, 밥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평안과 번영을 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간구로 설사 벼락부자가 되거나 암이 치유된다고 해도 사람의 존재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사랑 없이 몸을 불사르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에겐 육신의 평안과 삶의 풍요보다 존재로 목적과 삶의 이유가 먼저고 더, 아니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걸 구하는 게 바로 주기도문이다.

 

이 책은 그 주기도문의 목적과 의도를 설명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 뜻을 준행하고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들에게 그 의도가 분명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사람이 그렇게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다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 뜻이 땅인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 순종의 고백, 지금까지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헛되게 육신을 위해 구했다는 돌이킴이 필요하다.

 

이 필요를 구하는 게 주기도문이고, 이 책은 그 주기도문의 주제를 설명했다. 아무쪼록 진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이 하나님껜 있고 사람에겐 없는 단 한 가지 내 존재의 목적을 간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간절함을 가진 사람에게 약속한 이 은혜를 약속대로 베푸시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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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4 – 율법과 복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19. 05:25 Writer : 김홍덕

(21:17-26)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야고보의 집에 머물며 장로들에게 그간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해 전했고, 이에 장로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 사이에 모세의 율법을 폐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전하는 이교도와 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과, 이를 인하여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바울 사도는 예식을 행한다. 이는 나실인(6)에 관한 예식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머리를 깎음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예식이다. 할례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증거로 할례를 요구했을 때 바울 사도가 할례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는 걸 전하고, 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여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에게 목에 둘 수 없다"라고 확증한 일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할례라 필요 없다고 전한 사람임에 분명하고 증거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항변했다. 이는 변명이 아니다. 예수님도 늘 이런 비난에 시달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으로 이 모든 비난에 대응하셨다. 그건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이상으로 율법을 지켜내는 법이 없기 때문이며, 예수님은 율법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전하는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을 폐하는 게 아니라 완성하는 걸 전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은 율법을 폐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

 

언뜻 바울 사도의 결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복음은 가장 확실한 율법의 준행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율법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 둘 중에 누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를 전한 바울 사도이기에 율법을 지키는 예식으로 자신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란 걸 보여준 것이다.

 

바울 사도가 예식을 행한 건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

 

먼저 예수님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늘 비난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안식일에 병자가 예수님께 낫기를 구하면 어떻게 하나 관찰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병자를 고쳤다. 행위가 율법을 지키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유대인들에게 이건 명백한 율법 위반이었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큰 이유였다.

 

바울 사도 역시 이 비난의 한 가운데 처했다.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할례는 갈등의 요소였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이에 대해 행위로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증해 주었기에 담대히 전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도들의 보증만을 믿은 건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도록 거듭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니 성령께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는 게 본질임을 알게 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한 사도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다.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사람의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계획이다. 그 계획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상이 되시는 건 그걸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지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으로 율법을, 또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지켜내는 삶을 살아 내는 게 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행위에 앞서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다. 행위는 본성이 정해지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온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고, 바울 사도가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예식으로 보여준 이유가 여기 있다. 이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퍼포먼스가 아니다. 우리의 표상으로서의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지킬 것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도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참 가상해 보이지만 노력한다는 건 이루지 못한 지경에만 있는 것이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노력한다는 건 육신으로 도전하는 단계고, 말씀이 육신이 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아직 되지 못한 상태,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며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율법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분명하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예수의 이름, 곧 예수의 정체성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면 말씀의 본성대로 산다.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며, 그리스도는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되는 게 구원이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냥 말씀대로 살기만 한다. 그렇게 성경은 저절로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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