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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10)

데살로니가 전서 2장 앞부분에는 바울 사도와 동역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지를 간증하듯 전하고 있다. 당연히 이 마음은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인 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런 바울 사도의 마음은 오늘날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는 마음이다.

 

먼저, 바울 사도는 복음이 전해졌다면 그 과정에는 고난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복음은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므로, 고난 없이 복음이 전해질 수는 없다. 복음은 하나님 아들임에도 세상의 심판을 받는 낮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수고가 있었다. 그런 수고와 헌신으로 전해진다. 자기 인생과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오늘 나에게 복음이 전해진 복음은 그렇게 고난을 겪은 수고의 은혜다.

 

복음은 고난 없이 전해지지 않는 은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는 나로선 할 수 없는 혜택이다. 은혜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셨고, 그 뜻이 육신이 되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향유 옥합처럼 육신이 깨어져 그 속에 있던 육신이 된 말씀이 세상에 향기처럼 드러났으며, 그 향기에 취한 많은 사도들과 믿음의 선친들이 환난 중에 전하고 전하여 오늘 나에게 전해진 은혜다. 오늘 나에게 임하기까지 내가 한 건 없는데 나는 복음을 누리니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이 더해져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받는 이의 순종이 없으면 그 또한 전해지지 않는 게 복음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기까지 하며 복음을 주셨지만, 사람이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또한 열매 맺기 힘들다. 구원받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은 걸 보면,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열매 맺는 건 아주 놀라운 기적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바울 사도를 통해 이런 기적의 열매가 되었다. 더욱이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권한과 존중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아울러 어떤 탐심도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라고 확정한다.

 

바울 사도는 분명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보증하고 칭찬하고 있다. 환난을 이겨내고 지역의 성도들과 사람들에게 본이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은 사람이나 세상의 영광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전한 복음의 열매다. 고난을 이겨내며 전한 순전한 복음을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맺은 열매다. 말 그대로 줄탁동시다.

 

복음은 단 1%도 하나님의 것 아닌 게 없다. 그리스도의 도와 진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전하고 받는 사람 역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다. 이런 모든 섭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그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한 뜻이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다.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람과 복음이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절도 사람의 유익이나 사람 혹은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을 수는 있어도 복음에 기인하여 세상의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 복음은 그 자체가 세상에서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복음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사람이 세상의 복과 유익을 얻을 이유가 없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위로에서 우리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를 믿는 게 아님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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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항상 기뻐하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21. 13:49 Writer : 김홍덕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유명한만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심판하기도 한다. 물론 신앙인들은 이 말씀으로 자기가 심판받고 있다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가 성경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건 알고 있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과 달라서 노력할 뿐"이라며 그 심판을 회피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다는 걸 고백하지만, 신앙에 열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마음의 의도와는 달리 삶이 그렇지 않음에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씀 중 하나가 바로 '항상 기뻐하라'. 인생은 항상 즐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바울과 같은 사도들도 화를 내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완연한 사실들 앞에 '항상'이라는 빈도 부사를 준수하는 건 안 될 일로 여긴다.

 

그렇다고 성경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당연히 불순종과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살지 못했는데 천국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분명하지만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에 기대어 구원의 요행과 하나님의 자비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그게 통할 리는 없다.

 

거듭난 생명,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삶은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고, 이 분명함은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신앙의 열매로 요구하신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과의 괴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선명한 문제를 덮어두고 요행으로 구원을 바랄 수는 없다.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고서 천국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성경대로 살 수 없을까? 사람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되는데 나는 되지 않는 건 괜찮은 것인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님과 다른 존재, 즉 다른 DNA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될 수는 없다.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겸손으로 해결된 문제 역시 아니다. 이걸 해결하지 못한다면 구원도, 천국도 없다. 이것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가망조차 없다.

 

사람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건 근본적으로 성경의 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방정식 풀이법을 읽고도 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건 책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내가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건 예수님과 달라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걸 인정하면 희망이 보인다. 예수님은 이 어두움을 물리칠 빛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을 바로 알면 방정식이 풀리는 것이다.

 

사람은 성경을 행동 강령으로 여겨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지만 성경 말씀은 행동 강령이 아니라 존재를 정의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존재에 관한 말씀을 행위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어두움과 오류에 빠져 있다.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전부로 여기는 행동은 존재가 정의되면 자연스레 정해지므로 존재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이걸 몰라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누구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어떤 존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데. 사람은 성경을 읽고서 '나는 이렇게 행동했습니다'라는 대답을 내어놓는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는데, "부끄러워 숨었나이다"라고 행동을 고백한 아담처럼 행동한다.

 

성경이 물으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는 비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사람이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피조물이 의도한 목적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이건 당연한 권리고 이치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고, '너는 그런 존재냐?'라고 물으신다. 그 존재는 바로 하나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되어야 할 본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말씀, 곧 의와 뜻이 육신이 되면 그 의와 뜻을 표현하게 된다. 이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그런데, 그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다. 성경이 육신이 되었으니 그 삶의 모양은 성경대로 일 수밖에 없다. 이게 성경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육신은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그리스도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삶은 이렇다'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은 이런 삶을 산다는 걸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뜻하신 사람이 되면 성경은 그저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유다. 우리는 먼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사람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아서다. 하나님이 뜻하신 존재,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의 사람이 되면 성경대로 살게 된다. 더욱이 그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인만큼 육신이 된 본성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 존재를 그리스도라고 하고, 거듭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남이 거짓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예로 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 주제를 마무리해 보자.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행위 규범으로 지키려고 하면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한 대로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원하신다. 항상 기뻐하는 존재,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다면 이 성경을 이루는 것이다. 이게 더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의외로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녀와는 다투기도 하고, 자녀로 인해 화가 나고 걱정이 넘치긴 해도 자녀는 항상 기쁨을 주는 존재고, 자녀는 본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이럴 수 있는 건 서로 의미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이라는 정체성과 관계는 항상 기쁜 상태다. 이 사이에 기쁨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 간의 관계성에 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역시 이런 관계가 되는 걸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고, 언제나 어떻게 행동할까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바로 알고, 무엇보다 성경대로 살 수 있다.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늘 반성만 하는 신앙은 아무 소용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면 성경은 다 이루어진다. 이걸 믿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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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은 부활절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4. 20. 19:03 Writer : 김홍덕

다시 부활절이다. 해마다 부활에 대한 바른 의미를 이야기하게 된다. 부활에 대한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은 언젠가 있을 육신의 소생이다. 하지만 부활은 그게 다가 아니다. 부활은 죽을 수 없는 존재를 죽이려 하나 살 수밖에 없는 세계를 설명하는 기적이자 섭리다. 여기서 핵심은 죽지 않는 생명이다. 거듭나서 영원하게 된 생명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게 부활의 핵심적 계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신앙인들의 사고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와 그 이후의 부활과 재림 그리고 영생은 다소 다르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죄를 사하시고, 이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신앙으로 수용하지만, 부활과 재림 그리고 영생은 몽상적이고 신비한 세계로 여긴다. 사실상 확신보다 기대의 영역으로 여긴다.

 

분명 부활은 현실적으로 믿기 힘들다. 이건 사실이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걸 믿는 것보다 어렵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건 남의 일일 수 있지만, 부활은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믿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더욱이 죄 사함을 받았다면서도 늘 죄를 범하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확실의 상태에서 부활까지 내 일이 된다고 믿는 건 더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게 구원조차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구원받을 것이란 요행에 의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부활이란 요행을 하나 더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다들 믿는다고 말은 한다.

 

부활의 핵심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영생을 얻은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부활은 육신의 소생이 쟁점이 아니라 죽을 수 없는 생명이 쟁점이다. 부활을 육신으로 소생으로 생각하니 더 믿기 어렵다. 하지만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을 수 없는 생명인데 사람이 사람의 의로 심판하여 죽였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생명인 이유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부활을 믿는 믿음은 내 생명 정체성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내가 영원한 생명,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생명이라면 부활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섭리다.

 

이는 예수님은 사망 가운데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살리신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 영원한 생명이 되면, 아무리 죽여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었기에 어쩌면 부활조차 일상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어떤 결론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 곧 영생을 얻은 생명이 되면 된다. 부활을 믿느냐 의심하느냐의 차이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셈이다. 그러니까 논점은 여기에 맞추어야 한다. 영생을 얻었다면 어떤 죽임도 무력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었다면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영생을 이야기할 텐데, 이 영생도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영생을 단지 시간의 개념으로만 생각한다. 비둘기 한 마리가 태평양 동서 해안의 모래를 하나씩 날라서 바꾸는 시간이 영원의 시작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사고는 다분히 시간을 달력으로만 한정한 시간 개념일 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영생이 아니다. 성경의 관점은 지금의 육신을 가진 체로 영원히 달력을 넘기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진 존재가 되느냐다. 영원하신 하나님 품속에 거할 수 있는 이질감 없는 존재가 되면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영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걸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단지 상식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어떤 것인가? 놀랍게도 영생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주 선명하게 말씀하셨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게 바로 하나님이 정의하신 영생이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면 죽을 수 없는 존재, 누군가 불의하게 죽이려 해도 죽을 수 없고 부활하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 신앙은 이런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그러므로 부활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되면 얻는 기적의 섭리다. 오늘을 사는 이 몸이 다시 사는 달력의 시간이 언제일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태든 하나님이 행하시는 부활을 누리려면 먼저 영생을 얻어야 한다. 다시 한번 부활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이 보실 때 영원한 생명에게 임한 죽임을 이기는 능력이란 걸 상기한다면 이게 얼마나 당연한 말씀인지 알 수 있다.

 

오늘, 올해도 맞이한 부활절에 솔직히 믿기 힘든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우리가 믿는 영생을 얻으면 누리는 게 부활이란 걸 상고한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항상 살았다고 인정하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죽일 수 없기에 세상에 속한 죽음으로 귀속시키려는 사망에 우리가 속하지 않게 되는 은혜의 하나님 법이 바로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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