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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심을 믿는 사람,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해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의 잠언에도 결과는 생각지 말고 오늘, 지금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와 같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재림은 절대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 그 때가 설령 부지불시라 해도 결과는 같다. 낮에 속한 사람은 기쁨과 영광의 순간이고, 어두움에 속한 사람에겐 도둑과 같은 재앙이 된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함께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확정한다. 지금 설명하는 대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재림은 그저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명확하다. 오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아들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면 어쩌면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재임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사람들은 재림에 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 다미 선교회의 일을 회상해 보면,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오시니 재산 같은 건 필요 없다'라는 말에 자기 재산을 팔아 헌금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예수님의 재림에 나름의 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 바울 사도의 대비책은 다르다. 사도 바울의 대비책은 성도들이 서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우리가 자든지 깨어 있든지 살리기 위함이므로 이를 서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격려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가장 온전한 재림 대비책이란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가장 온전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이다. 오시는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재림은 미운 오리 새끼가 만난 백조 떼와 같은 구원 그 자체다. 내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면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이 없다. 언제나 소망은 속히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도둑이 임하는 것 같은 사람에겐 오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재림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정체성인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의와 존재 목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 삶은 노력하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이게 생명과 본성의 이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하나님께서 정한 구원인 창조 목적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격려하고, 세상과 교회에서 덕을 세우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재림 대비책이다. 사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이사하는 날 자전거 타고 놀고 있는 아이처럼 재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언제든 부모가 자기를 데려갈 것을 아는 아이처럼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 자기에게 생명과 구원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재림의 대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완벽한 재림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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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는 재앙 같은 일이지만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고대하던 일의 성취가 된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건 제자리의 회복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낮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쓴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피차 덕을 세우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히 여기며 화목하는 사람이 낮에 속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흉배와 투구라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서서 진리의 띠를 띠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이라는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이다. 두 말씀 모두에 흉배와 투구가 나온다. 흉배는 정체성이다. 대제사장의 의복에 속하기도 하고, 군인을 방어하는 갑옷이자 병사의 보직을 표시한다. 따라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 또 의의 흉배라는 건 믿음과 사랑과 의가 낮에 속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우리를 지키는 갑옷과 같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믿음과 사랑은 군인의 소속을 표시한 흉배처럼 낮에 속한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믿음 자체는 물론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은 존재의 신 여호와를 믿는 것이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공로를 쌓으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의 하나님은 바알이고,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흉배가 달라진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다. 상대를 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표현은 대상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서로가 의미를 부여한 배우자 간에 헌신과 희생은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자기 짝이 아닌 이성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불륜이고 음란이다.

 

특히 사랑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선후를 분명히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먼저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인데, 창조하셨다는 건 창조하시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피조물인 사람에겐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다. 그 관계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으로 맺어진다. 하나님은 내용이 되고 사람은 그걸 표현하는 육신인 관계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고 곧 사랑이다. 이걸 믿는 게 바로 믿음이다.

 

또한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쓰라고 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머리는 삶을 주관한다. 그러니까 머리는 곧 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다. 따라서 사람의 의는 자기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 자체다. 이게 사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본질적 모습인 그리스도가 주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의()는 곧 구원이다. 존재로서 사람은 존재의 목적을 소망해야 한다. 특히나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한 유일한 존재다. 그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희망이자 소망은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목적을 소진하는 게 존재로서 완전함인 반면 목적을 상실하거나 알지 못하면 바로 버려진다.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살아가는지를 소망해야 한다. 존재로서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게 구원이고, 그 목적이 삶을 주관해야 한다. 즉 그 목적이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귀신 들린 자는 그 목적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소망하는 게 구원의 투구다.

 

결론적으로 저의 재림이 도적이 임하는 것 같지 않은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반갑고 기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재림은 절대 심판이 아니라 환희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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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때를 '도적같이' 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때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적절한가 싶은데,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이게 아주 적절한 표현이란 걸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된다.

 

도둑은 어두울 때 다니고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다. 그런 도둑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사람은 주님이 임하시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고, 또 주님이 오실 때 상태가 어두운 사람이다. 해가 없는 어두움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없는 어두움을 말한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임하는 사람은 재림을 원치 않고 그리스도에 관해 어두운 사람이다.

 

주님의 재림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정한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이 도둑이 드는 것처럼 원하지 않는 일이고,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어둡다는 건 심판이 임한 것이다. 돌이킬 기회도 없다. 아니 기회를 다 소진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면 재림은 앙망하고 원하던 일이므로 그때가 언제여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재림은 도적같이 임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는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겠지만, 그때가 언제여도 도둑의 방문 같은 느낌이 아니라 군에 간 아들의 기대하지 않았던 휴가 같아야 한다. 어차피 재림의 때는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라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핵심은 그때가 언제여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에 관한 핵심은 그때가 언제인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다.

 

재림이 언제여도 상관없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한 교과서적인 답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이를 낮의 아들이며 어둠에 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 예수님에 관해 어둡지 않고,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또한 빛 가운데 있다.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거듭난 사람에겐 낮에 오시는 게 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위로한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낮의 아들이요, 어두움과 술 취함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 언제 오셔도 반갑고 기쁜 만남이 된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이어 성도의 삶의 모습을 권면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기쁜 사람으로 살 것을 권면한다. 이런 삶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생명이 바뀐 사람이고, 생명이라면 본성이 있어 그 본성대로 산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산다. 그렇게 바뀐 존재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상관없다. 더 본질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다신 오신 사람이다. 결국 낮에 속한, 거듭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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