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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40)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라 달리 설명이 필요할 게 없는 말씀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분명히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한 말씀, 곧 내가 죽어서 영혼으로 영원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에 대한 엄중한 말씀임에도 주 예수의 무엇을 믿으라는 건지를 생각한다거나, 내가 예수를 믿는데 집이 왜 구원을 얻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데, 정작 예수의 무엇을 믿는 거냐고 물으면 머뭇거린다. 예수가 실존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헌신과 기적이 실재였다는 걸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시험이나 경쟁이나 입찰에서 무조건 이기게 해 준다는 걸 믿는다는 건지, 도대체 예수의 무엇을 믿는 건지도 선명하지 않은 채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구원도 그렇다. 구원이란 심각한 위험에서 건져졌다는 건데, 도대체 어떤 위험에 처했다가 어떤 안전한 상태로 옮겨지는 구원을 얻었다는 것인가? 또 구원은 죄사함에서 시작된다고 하면서 여전히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구원은 또 어떤 구원인가? 이런 고민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얻는 게 구원이라는 프레임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어서 그저 거기 머무는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영혼이 영원히 어떤 상태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엄청난 문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바울 사도가 간수에게 말한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 예수를 전하다 채찍질 당하고 감옥에 갇혔던 바울이 전하는 예수다. 오늘 우리도 이런 예수를 믿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 전하는 예수를 오늘을 사는 사람이 믿을 수 있을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오히려 세상 높이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과연 세상에서 실패한 몰골로 자기에게 "이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전한다면 믿을까?

 

오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 믿으면 손실을 보고 감옥에 갇히는 예수를 믿는 것일까?

 

바울이 전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는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당장 이 예수를 믿으면 점치는 여종처럼 손실을 보는 예수며, 감옥에 갇히는 예수다. 정말 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걸 알고 믿는지 정말로 생각해 봐야 한다. 구원을 베푸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믿는 건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그런 예수는 사람이 창조한 우상일 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아니 모든 성경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성경을 믿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 즉 다른 존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세상에서 낮아지고 죄인이 되는 복음을 믿는 게 아니라면 언감생심 구원은 없다. 당장 목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실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진정한 복음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그 예수를 믿어야 얻는 게 구원이다.

 

십자가로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아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이 될 때 구원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삶이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 가치로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인 셈이다. 이는 천하게 된다는 일반화가 아니다. 세상에서 낮아진다는 건 서로의 주장이 있을 때 "네가 옳다"라고 인정하게 되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성은 생명이 바뀌어야 가질 수 있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기에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사람이 "너 옳다"라고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게 있는데 바로 몸을 써서 수고하는 것이다. 이게 낮아짐이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건 신분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네가 옳다고 하면 수반되는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생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주장하는 바에 심판을 받아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 예수님의 본성과 생명이 나의 생명과 본성이 되고, 나는 그 본성으로 살겠다는 순종과 그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의라는 걸 믿는 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세상에서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건 구원을 도둑질하려는 시도다. 물론 성공할 수 없다.

 

이런 그리스도의 삶은 수고를 감당하는 삶이다. 이게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듯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 삶을 기록한 게 성경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저 본성대로 살 뿐인데 성경을 이루는 삶이 된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구원과 무관한 삶이다.

 

이 본성대로 수고를 감당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늘 더 수고하는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마음이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집을 구원한다. 바울 사도가 '너와 네 집'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적어도 구원을 이야기하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고, 이걸 알고 믿어야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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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40)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의 주인은 상관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송사했고,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채찍으로 때린 후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옥터가 흔들리고 옥의 모든 문이 다 열리며 갇힌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다. 놀란 간수가 일어나서 상황을 보니 모든 죄인이 달아난 줄로 알고 스스로 자결하려 했는데, 사도 바울이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으니 몸을 해하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에 멈추고는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지 묻는다.

 

 

이 상황에는 땅이 진동하면서 감옥의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 죄수를 결박한 게 어떻게 풀렸는지가 우선 의문스럽긴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구하였는지가 사실은 더 중요하고 궁금해해야 하는 지점이다. 물론 죄수를 지키는 간수로서는 죄수가 모두 탈옥한다면 신변을 보존하긴 어려웠겠지만, 어째서 바울과 실라가 달아나지도 않았는데 두려워 떨면서 구원을 구했는지가 성경을 보는 사람의 중요한 관점이어야 한다.

 

간수는 자기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사건 앞에서 구원을 염려했다. 육신의 삶에 일어난 징조를 자기 영혼의 구원과 결부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연 그 한순간의 일로 그렇게 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보는 게 옳다. 꿈도 잠재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사람이 순간의 일로 자기 운명에 관한 태도 변화를 취하는 건 가식일 뿐이다. 간수는 평소에도 자기 구원에 관해 많은 고민이 많았던 사람인 게 분명하다.

 

사람은 갑자기 구원을 간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는 장면도 이와 비슷하다. 성경에 "나를 따라오너라" 하니 생업(그물)을 던져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영화처럼 그 한순간에 제자들 마음이 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고,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를 따라오라는 한 마디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반추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평안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길을 가다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외치는 소리에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다.

 

정황상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집에 가는 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결하려 했던 사람이 상부의 지시도 없이 죄수인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려가서 씻길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 세례를, 그것도 온 집이 세례받는다는 건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간수의 행동은 구원을 향한 대단한 결단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자기 구원에 관해 바울과 실라에게 묻고 구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바울과 실라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간수로서 죄수를 자기 집에 데려가 죄수의 죄에 동참할 결단을 할 정도로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구원을 사모해야 하는지를 이 간수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구원이 아주 쉬운 것이라고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거저 교회에 가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최종적인 표현은 그게 맞는 말이지만, 죄가 뭔지, 십자가가 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게 어떤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거저 믿는다는 말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과 십자가를 크게 모독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건, 십자가가 인생의 올바른 진리이자 의로움이기에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건 종교적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건 생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건 삶의 가치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다. 높은 곳에 있는 영광이 있는 게 아니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참된 영광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관이 과연 십자가의 가치관과 같은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아니면 구원은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건 정말로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기 전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정상이 아니다. 자기가 이때까지 의지하며 살아온 세상의 가치관, 높이 올라 영광을 얻고 평안을 얻는 걸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하나님이 지시할 땅 같은 구원을 향해 출발한다는 게 교회에 가서 교리문답에 답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결단이다. 이런 결단과 과정이 없었는데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말 그대로 환난이 그 앞에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도 갈릴리 지방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제자들처럼 빌립보 지방에 전해진 십자가의 도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은 구원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어쩌면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다는 사실보다, 다시 만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들은 추측이라 차치하더라도 말 한마디에 자기 육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온 집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분명 그는 구원이 자기에게 없다는 걸 알고 두려워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극복하고 구원을 얻었다.

 

구원은 인생의 가치를 바꾸는 결단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원래 사람의 존재 목적이므로 사람에게 쉽다는 의미지 세상 가치관에 올인하여 살던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의 삷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다는 건 아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구원은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구원은 그저 교회에 가서, 또 나면서부터 다니는 습관에 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얻는 게 아님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줄로만 알고 산 한평생이 수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사모한다면 이 간수의 간절함과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래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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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18)

바울 사도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중에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을 만났는데 점이 신통했는지 그 여종의 점으로 인해 주인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 일행으로 인해 귀신이 나가게 되었다. 이에 여종의 주인은 바울 일행을 송사했고,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을 향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며 소리치는 걸 그치지 않아 괴로워하던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다.

 

 

성경이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건 한마디로 정신을 빼앗긴 상태다. 이는 여러 글에서 설명했었다. 정신을 상실했다는 건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일컫는다. 사람에겐 삶의 의미이자 목적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귀신 들린 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적을 상실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걸 빌립보에서 바울 사도가 만난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삶의 목적을 잃고 세상의 가치에 메여 산다는 건 곧 주인에게 경제적 도구였던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처럼 세상만 이롭게 한다.

 

성경은 이 여종이 바울을 괴롭혔다고만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과 남을 괴롭게 한다. 대표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다닌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 거하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가 계시는 동안 산 아래에 데려온 사람 역시 물과 불에 스스로 빠졌다고 했다. 빌립보에서 만난 이 여종도 바울을 괴롭혔다. 나중에 귀신이 떠난 후 이 여인의 모습이 차분한 것으로 보이니 괴롭힌 주체는 귀신이었던 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이 여인으로 인해 당한 괴로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실라와 함께 투옥까지 당한다.

 

어떻게 보면 바울을 높이는 것 같은 말을 여종이 하고 있음에도 바울이 괴로웠던 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알아보면서도 귀신에게 또 세상의 종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여종처럼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하며 '너희에게 구원을 전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본다는 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거듭난 사람에게 큰 괴로움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겪는 큰 괴로움이 있는데, 그건 하나님이 모독당하는 것과 사람이 구원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 그리고 사람이 복음을 알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는 걸 보는 것이다. 이 여종을 보면, 자기 자신은 구원받지도 못한 상태인데 바울 사도가 구원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거듭난 사람이 그걸 보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괴로워하고 귀신을 내어쫓았다. 세상 가치에 메여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바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며 먼저 여종의 상황을 반추해 볼 필요가 여기 있다. 나는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인가 반추해 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십자가를 지는 삶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나는 세상이란 주인만 살찌우는 귀신 들린 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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