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은 성경의 핵심이다. 사람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즉 구원은 곧 거듭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3)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초등학생 같은 답변이라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만큼 진지한지는 알 수 없다. 경험에 의하면 기독교인 대게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 듯하다. 이게 유일한 구원의 길인만큼 깊은 묵상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이건 행간을 읽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상고해야 한다. 지금껏 이야기한 목적론에 따르면, 생명, 살아있다는 건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 목적을 상실한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두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살았다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기준이다.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준이고, 그 기준에 순종하는 게 거듭남이다.
앞서 성선설, 성악설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날 때 선악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게 아니며,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설명했다. 그 순종이 생명이 바뀌는 것,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아 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살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는 창조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므로, 노력이나 신념으로는 되지 않고 다른 본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 이것이 거듭남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이 생명 이전은 모두 사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육신의 호흡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은 사망과 죄의 상태고, 하나님의 뜻이 본성이어야 산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없는 시절에는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며, 자기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다. 당연히 사망 가운에 사는 것이다.
그 사망의 상태는 창세기 시작에 나오는 혼돈의 상태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면서 이리저리 살아가는 혼돈의 세월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의가 달라 다투고,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위로 가려고 하나 서로의 의가 달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렇게 방황하는 혼란한 삶의 시절은 어두움의 시절이다. 삶에 대한 밝은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더 나아가 이 빛이 비췸이 천지창조 시작에 말씀하신 빛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삶의 어두움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생명은 잉태하여 태어난다. 마늘 먹는 노력으로 될 수 없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생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역시 그렇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 그래서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성경에 이것 외에 다른 법을 말씀하신 게 없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물'은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참뜻을 알기 위해 심령에 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 이 진리의 법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예수님 탄생의 비밀인데, 이는 우리가 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걸 보이신 기적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한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므로 사람이 거듭난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한 듯한 신앙인들의 말에서 기독교인들이 사람과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예표로서 일어난 기적이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세례 문답에서 말로 하는 예수 믿는다는 고백으로 얻는 구원의 미사여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내 영혼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거듭남이 깊은 묵상도 없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아주 심오하고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며, 그 실체를 알아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알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소식은 다 들었다. 필요한 건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 중에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소식을 들었으므로 심판은 받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멸망이고,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순종하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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