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87

(회색 성경) 거듭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4. 06:24 Writer : 김홍덕

'거듭남'은 성경의 핵심이다. 사람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즉 구원은 곧 거듭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3)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초등학생 같은 답변이라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만큼 진지한지는 알 수 없다. 경험에 의하면 기독교인 대게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 듯하다. 이게 유일한 구원의 길인만큼 깊은 묵상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이건 행간을 읽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상고해야 한다. 지금껏 이야기한 목적론에 따르면, 생명, 살아있다는 건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 목적을 상실한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두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살았다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기준이다.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준이고, 그 기준에 순종하는 게 거듭남이다.

 

앞서 성선설, 성악설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날 때 선악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게 아니며,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설명했다. 그 순종이 생명이 바뀌는 것,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아 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살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는 창조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므로, 노력이나 신념으로는 되지 않고 다른 본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 이것이 거듭남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이 생명 이전은 모두 사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육신의 호흡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은 사망과 죄의 상태고, 하나님의 뜻이 본성이어야 산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없는 시절에는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며, 자기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다. 당연히 사망 가운에 사는 것이다.

 

그 사망의 상태는 창세기 시작에 나오는 혼돈의 상태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면서 이리저리 살아가는 혼돈의 세월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의가 달라 다투고,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위로 가려고 하나 서로의 의가 달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렇게 방황하는 혼란한 삶의 시절은 어두움의 시절이다. 삶에 대한 밝은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더 나아가 이 빛이 비췸이 천지창조 시작에 말씀하신 빛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삶의 어두움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생명은 잉태하여 태어난다. 마늘 먹는 노력으로 될 수 없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생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역시 그렇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 그래서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성경에 이것 외에 다른 법을 말씀하신 게 없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은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참뜻을 알기 위해 심령에 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 이 진리의 법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예수님 탄생의 비밀인데, 이는 우리가 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걸 보이신 기적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한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므로 사람이 거듭난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한 듯한 신앙인들의 말에서 기독교인들이 사람과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예표로서 일어난 기적이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세례 문답에서 말로 하는 예수 믿는다는 고백으로 얻는 구원의 미사여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내 영혼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거듭남이 깊은 묵상도 없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아주 심오하고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며, 그 실체를 알아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알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소식은 다 들었다. 필요한 건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 중에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소식을 들었으므로 심판은 받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멸망이고,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순종하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성경 데살로니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비교하면 칭찬이 아주 많은 서신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이겨냈고, 말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큰 확신을 가진 신앙이라고 칭찬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믿는 소망이 있었다. 다만 이런 소망으로 인해 일부가 재림에만 의미를 두고 현실의 무가치하게 여기는 잘못된 신앙에 빠진 데 대해 바울 사도가 두 번째 편지에서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내하는 소망을 칭찬했다. 이는 복음이 지향하는 바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삶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이런 성도들의 모습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보증한다.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능력이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큰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

 

일반적으로 능력이라고 하면 초인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는 거로 생각하지만, 바울 사도는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는 게 능력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인내가 능력이라고 말씀한다.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인내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하나님 능력의 뿌리는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다.

 

사랑의 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 위에 있다. 하나님과 온전하고 의미 있는 관계가 성립된 사람이 표현하는 헌신과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이다. 이는 사람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이성과 사랑하고 결혼한다. 관계의 의미 없이 이성을 만나는 건 매춘이고 음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도 이것인데, 자기 짝이 아닌 대상과의 관계가 바로 음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헌신적 수고다. 먼저 하나님의 관계가 정립된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온전한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이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특히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관계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이 행하는 수고는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헌신적 수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순종으로 준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순종,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목적에 순종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 낮아짐과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낮아져서 섬기는 건 당연히 수고를 수반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빠질 수 없는 게 있는데 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낮아짐은 신념과 노력이 아닌 낮아짐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냐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칭찬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인 사랑의 수고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낮아진 마음으로 섬기는 본성으로 거듭난 생명의 삶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따라서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사랑의 수고가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섬김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망의 인내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바란다는 말로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망에 대한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다. 세상의 삶에서는 사지 않은 복권의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웃지만,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창조, 존재 목적과 무관한 것들을 마구 소망한다. 당첨을 바라면 복권부터 사야 하듯,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법과 뜻 안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

 

또한 소망은 자기 정체성에 종속된다. 양에게는 썩은 고기에 대한 소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생명,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말씀하심은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

 

이 예수는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는 평안과 풍요를 약속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평안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봐도 예수님은 풍요의 아이콘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평안과 풍요를 소망하고 간구하는 건 의미가 없다. 간구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건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아시는 세계라고 일갈하셨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요와 평안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그리스도다. 당연히 그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필요로 만든 우상이다. 소망은 정체성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풍요를 먼저 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정체성을 소망한다는 것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이 칭찬한 소망이다. 즉 세상의 풍요와 평안을 구하는 소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다. 그건 곧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구하는 소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구할 건 하나님의 뜻이지 세상의 풍요와 평안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소망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증한다. 이 소망은 세상에 속한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스스로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와 같은 본성을 소망한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소망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소망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회색 성경) 성선설, 성악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2. 05:49 Writer : 김홍덕

201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쓴 블로그의 역대 최대 조회 글은 성선설과 성악설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듯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고 죄 없이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타락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데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얻는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신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로봇이나 아바타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뒤에 설명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건 일면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달성된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육신이라는 형상에 한정해서 보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모습이기에 기뻐하셨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선악의 상태를 이야기해 보자. 이해를 위해 휴대전화를 가지고 설명하려 한다. 사람에게 창조주이자 주는 하나님이고, 휴대전화에 있어 창조주이자 주인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사람 창조 목적이 있듯, 스마트폰으로 발전한 휴대전화를 만들고 구매하는 사람의 목적은 통화하고, 인터넷 활용이다. 제조사는 그런 소비자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전화기를 만든다. 그렇게 설계하고, 제조한 다음에 엄격한 품질 검사를 시행한다. 그리고 설계 기준에 맞으면, 즉 소비자의 목적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출하한다. 여섯째 날 하나님이 감탄한 사람은 바로 이런 상태다.

 

하지만 아직 휴대전화는 개통되지 않았다. 소비자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는 상태다. 이때는 아직 목적 안에 있는 상태가 아니다. 즉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목적 안에 있지 않다는 건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아직 죄의 상태다. 창세기 시작에 있는 '혼돈하는 땅'으로 표현된 사람의 상태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이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다만 사람은 스스로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육신으로 창조되고, 태어난 인생은 개통되지 않은 휴대전화 같은 상태

 

창세기 2장에서는 다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상세한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다. 즉 생령이 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나온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 된 사람이다. 휴대전화로 치면 주인이 정해지고 개통해서 목적대로 사용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진정한 휴대전화이듯, 사람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적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생명 본성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 창조의 최종 목적은 바로 생령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이런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a Christ)라고 한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습의 표상이고 본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실체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놋뱀처럼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람이 보고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게 하나님 구원의 계획이다. 이 계획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운 의지로 사람이 스스로 순종함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사람은 그걸 자기 인생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으로 생각한다. 이게 십계명에서 금한 도둑질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사람은 날 때 선한 존재, 악한 존재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선한 존재로 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뜻만 수행하는 로봇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게 되고, 그 상태에서 사람이 타락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신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악한 상태로 창조하신 다음 갱생시키는 계획이라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될 수 없다는 오류에 빠진다.

 

창세기의 흐름도 그렇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존재로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시고, 2장에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 곧 말씀과 계획으로 생명이 되면 생령, 곧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된다는 걸 말씀하셨다.

 

그리고 3장에서의 타락은 하나님이 주신 의지로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시고,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없고, 서로 죽이는 타락한 모습을 설명한다. 이는 주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휴대전화와 같다. 그런 작동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폰뱅킹으로 송금하는 게 선하지 않듯,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선한 행동을 해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악한 행위가 된다.

 

선악은 결국 사람이 선택한다. 하나님이 주신 의지로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 악이 되고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님을 보고 그 모습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순종하면 의롭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자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다. 사람이 보고서 돌이킬 수 있는 표상으로 예수님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보이셨다. 그 모습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선한 사람, 곧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나는 사람은 아직 개통되지 않은 휴대전화처럼 선악의 어떤 존재로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을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살아 있는 생명이 되지만,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인 양 자기 의지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악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성경은 이 법에 관해 사람이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사람이 선택하고 순종해야 할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작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무단횡단하는 사람 모두가 죄인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 15:2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선하게 태어났는지, 아니면 악한 존재로 태어났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게 어느 것이라도 나를 구원하거나 나의 범죄를 핑계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낮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게 본성이 되는 하나님의 생기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게 순종이고, 구원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