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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령과 거듭남의 확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7. 12:46 Writer : 김홍덕
성령은 우리를 말씀으로 잉태시켜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며, 우리가 성경대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아는 것 같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일부만 알고 있음에도 더 알려고 들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성령을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령은 지금까지 다룬 죄 사함, 구원, 거듭남을 확신하게 하신다.

 

사람들은 주로 기적의 아이콘으로만 성령을 인식하는 데, 그건 성령의 직임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성경 속 기적의 본질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 중 무엇이 최고의 기적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다.

 

성령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아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건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기적이다.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의 생명을 바꾸어 거듭나게 하시는 것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므로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다. 거의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하는데, 성령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의 심령 안에 있는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켜 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뜻하신 생명이 되도록 하신다. 이게 우리 구원의 법이므로 성령은 이를 이루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말씀 역시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우리 구원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씀은 곧 우리 역시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이렇게 생명이 바뀌면 크게 두 가지가 달라진다. 하나는 구원을 의심하고 부인하고자 해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고, 또 하나는 굳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이기에 그저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되며, 그런 자신을 보며 구원의 증거를 얻는다. 이건 사망이나 칼과 칼이나 마귀의 권세나 사탄의 유혹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생명의 본성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듯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변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대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병자를 고치고, 가난을 해결하는 하나님 아들의 본모습을 보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굽히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를 저지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시기까지 했다. 제자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전능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걸 이해할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고,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달아날 정도로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이 시대의 신앙인들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리라 믿었던 그리스도를 예수로 믿는다.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자기를 평안과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최소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믿었고, 그 믿음을 좇아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 순종의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니 제자들이 달라졌다. 독립을 이루고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다. 성령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영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구원을 얻었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건 생명이 바뀌었다는 걸 의미한다. 생명이 바뀌었다면 이제 바뀐 생명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산다. 그 생명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의 능력과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육신과 삶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삶의 모양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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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같은 구원과 죄 사함과 거듭남은 크고 큰 은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은혜인 건 아니다. 내가 확신하고 내 것일 때 은혜고 구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과 증거를 구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구원의 확신에 의심이 있다. 더욱이 그 마음을 말하고 표현하고 인정하는 건 더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감추기에 해결하기 더 어렵다.

 

구원의 확신은 마치 합격증 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의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은 아직 합격증을 기다리는 상황이므로 사실상 구원을 믿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믿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고 출근이나 등교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불안은 없다. 아울러 간절하게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 싶은 마음 역시 합격을 바라며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 같아서 확신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구원의 확신이 합격증 같다는 건 제법 적절한 비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합격증은 삶과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보다 언제라도 재직, 재학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회사와 학교의 법과 규칙에 따르고, 복지나 혜택을 누린다는 게 본질이다. 이게 성경의 표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건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사실상의 정답은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확신이다. 재직 중인 직장인은 구내식당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재학 중인 학생은 강의실이나 학적과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런 걸 의심하지도 않는다. 자기 존재의 확신 때문인데, 한 발 더 나가서 생각하면 그걸 믿으려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음을 북돋우는 신앙과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확신하는 사람, 아니 그런 걸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행동을 보고 정체성을 느낀다. 대학 캠퍼스에 앉아서 자기가 학생이란 걸 느끼고 감상하며, 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가 그 회사의 일원임을 느낀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과 말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느끼고, 이전과 다른 자기 삶에 놀라고 감사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 거듭남의 증거를 자기 심령 안이 아닌 밖에 있는 어떤 것에서 찾는 건 항상 불안하다. 나의 자아 밖에 있는 건 나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종과 같다. 예를 들어 방언이 구원의 증거라고 치면, 구원받은 방언과 사탄이 주는 방언은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또 어떤 기준으로 방언의 종류나 수준을 정할 것인지도 문제, 아니 논쟁거리가 된다. 즉 확신할 수 없는 요소가 늘 있다.

 

수가성에서 만난 물 긷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서 넘쳐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 본능처럼 있어야 한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은 어쩌면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어야 한다. 이는 구원과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으로 나고,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본성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야옹' 소릴 낼 수 없고,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잉태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과 역략과 감증과 증거를 가지고 자기 구원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야 구원의 확신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야,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있어야 구원이 확증된다. 생명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또한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 모든 건 생명의 법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나기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얻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된다. 결국 성령이 있어야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령께서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킨 사람은 성령이 심령에 계실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게 아니라면 성령이 계시지 않으므로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을 갈구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이 내재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므로 객관적 증거를 갈구한다.

 

반대로 성령이 내재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 본성이 삶을 이끌기에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과 말과 생각과 가치관에서 그리스도를 느낀다. 당연히 생명 본성이 이끄는 구원의 증거들은 부인하려 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사람들은 남자로 난 사람은 남자가 되길 갈구하지 않는 것처럼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 (고후 1:22)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는 결국 자아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자기 심령에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자기 삶과 말과 생각과 가치가 이전과 다르다는 걸 보며 자기가 거듭났음을 확신이라기보다 부인할 수 없음을 안다. 심지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자리에 이르러야 구원받은 상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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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거듭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4. 06:24 Writer : 김홍덕

'거듭남'은 성경의 핵심이다. 사람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즉 구원은 곧 거듭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3)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초등학생 같은 답변이라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만큼 진지한지는 알 수 없다. 경험에 의하면 기독교인 대게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 듯하다. 이게 유일한 구원의 길인만큼 깊은 묵상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이건 행간을 읽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상고해야 한다. 지금껏 이야기한 목적론에 따르면, 생명, 살아있다는 건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 목적을 상실한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두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살았다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기준이다.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준이고, 그 기준에 순종하는 게 거듭남이다.

 

앞서 성선설, 성악설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날 때 선악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게 아니며,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설명했다. 그 순종이 생명이 바뀌는 것,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아 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살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는 창조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므로, 노력이나 신념으로는 되지 않고 다른 본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 이것이 거듭남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이 생명 이전은 모두 사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육신의 호흡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은 사망과 죄의 상태고, 하나님의 뜻이 본성이어야 산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없는 시절에는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며, 자기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다. 당연히 사망 가운에 사는 것이다.

 

그 사망의 상태는 창세기 시작에 나오는 혼돈의 상태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면서 이리저리 살아가는 혼돈의 세월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의가 달라 다투고,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위로 가려고 하나 서로의 의가 달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렇게 방황하는 혼란한 삶의 시절은 어두움의 시절이다. 삶에 대한 밝은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더 나아가 이 빛이 비췸이 천지창조 시작에 말씀하신 빛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삶의 어두움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생명은 잉태하여 태어난다. 마늘 먹는 노력으로 될 수 없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생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역시 그렇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 그래서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성경에 이것 외에 다른 법을 말씀하신 게 없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은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참뜻을 알기 위해 심령에 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 이 진리의 법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예수님 탄생의 비밀인데, 이는 우리가 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걸 보이신 기적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한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므로 사람이 거듭난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한 듯한 신앙인들의 말에서 기독교인들이 사람과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예표로서 일어난 기적이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세례 문답에서 말로 하는 예수 믿는다는 고백으로 얻는 구원의 미사여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내 영혼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거듭남이 깊은 묵상도 없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아주 심오하고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며, 그 실체를 알아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알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소식은 다 들었다. 필요한 건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 중에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소식을 들었으므로 심판은 받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멸망이고,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순종하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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