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그의 아들들,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형들에게도 흉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고 하니 가서 곡식을 사 올 것을 명하고 이에 아들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이 팔아버린 동생인 요셉은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는 반면 그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자기와 한 어머니(라헬)에게서 난 베냐민을 찾지만 보이지 않자 그의 형들을 첩자로 몰아서 동생을 데리고 와야 한다며 시므온을 포로로 잡아 두고 곡식과 함께 가져온 돈도 자루에 넣어 보내는 등의 일들을 지나서 결국 야곱과 요셉은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꾼 꿈을 연고로, 또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한 연고로 미워하여 요셉을 죽이고자 했으나 유다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애굽의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렸는데 그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이들이 세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혈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듯, 이 말씀이 우리 육신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식의 관점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혈통이 유대인일 경우에만 해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전 포스트에서 요셉은 그 형제들이 볼 때 요셉이 꾼 꿈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를 제하여 버리려 했던 것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그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며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같은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 요셉이 그 형제들과 또 야곱을 만나는 장면은 부활에 관한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듯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도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 역시 그 아비와 그 형제들, 곧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앞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물리적인 세상을 만드시고 또 만드신 사람들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기록한 책이지만, 창세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어떠함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아담에서 또 아브라함에서부터 야곱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이스라엘이라는 지구상의 한 나라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심이 아니라 오늘 이 성경을 읽는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곧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버림으로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것은 한 사람이 자기 신앙 안에서 꿈꾸는 요셉의 이야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서 버린 것이 오히려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그 형들은 그 꿈을 무시했습니다. 아니 무시할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요셉의 꿈은 아버지와 그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절을 한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절하는 대상이 나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사냥도 변변하게 하지 못하고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어린 요셉에게 자신들이 절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이 가진 가치 기준인 육신의 능력이나, 또 사회에서 존중받는 나이와 같은 기준들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 아니 오히려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에게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패자가 된 것에 자신들이 경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터무니없는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고 결국 팔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힘든 몰골의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신들이 예수님을 경배(절)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그 형들이 팔아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이 가진 보잘 것 없는 모습, 연약하고 세상의 도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추한 모습의 이 인생이 어떻게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라며 그것을 가차 없이 버리고 세상의 기준이 말하는 성공과 또 고상함과 이김을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일관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은 늘 부족합니다. 우리가 아는 일반 기성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부족하기 때문에 늘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언제 그 노력이 끝날까요?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세상의 가치로 성공한 인생이 되려하다 보니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평생을 소모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우리가 하찮게 여겨 버렸던 것, 마치 건축자가 보기에 쓸모없어 보여서 버린 돌과 같은 우리 인생 이 자체가 우리 인생이 가진 끝없을 것 같던 존재 정체성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보잘 것 없다며 버린 요셉으로 인하여 그들이 굶주림을 해결하게 된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자기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그 결핍의 해답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유대인의 왕이라 말하기에 터무니없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달리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인생을 항상 부족하게 여겨 그것을 어떻게든 메우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라는 그 정체성을 늘 감추고 버리고 이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끝없는 결핍인 존재 정체성의 배고픔과 존재 이유의 갈증을 해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버려진 요셉과 죽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이 연약하고 부정해 보이는 우리 이 인생의 본 모습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큰 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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