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인하여 야곱의 모든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이주 과정에서 요셉이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8)



요셉의 일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것은 형들의 시기 때문이었지만 요셉은 이르기를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가뭄에서 지키시려 함이며,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고백은 이 블로그에서 야곱과 요셉에 대한 글을 써 오는데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조상입니다. 이 야곱과 요셉의 일은 오래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해 온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비단 이 야곱과 요셉의 일뿐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굳이 성경을 묵상하고 신앙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밥 벌어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또 다릅니다만, 성경을 읽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나는 왜 사는지와 같은 의문을 알아가고자 성경을 대하고 있다면 성경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 버린 것은 세상의 가치관



그러면 이 요셉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다가 미움을 당했습니다. 그 꿈은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고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에 대하여 형들은 막내(12중 11번째 아들)에 가사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 동생이 자기들의 경배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우습게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주 합당한 관점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요셉은 아비와 형들에게 절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여지도 능력도 없는 그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과 아주 비슷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서 성경은 건축자의 버린 돌(마 21:42)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건축물을 짓는 건축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버릴 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죽어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요셉도 같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보는 관점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잘 것 없이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더니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그것이 육신으로 한 세상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하심과 같이 요셉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곧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연약함이 곧 구원임을 보이시는 말씀



예수님과 또 요셉이 이러한 과정을 보인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을 버리려 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씩 망상처럼 육신의 일반적인 한계와 정체성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슈퍼맨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때로는 흥부와 같이 갑자기 큰 부자가 되면 좋겠고, 또 때로는 투명인간과 같이 되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시간을 넘나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것은 그렇지 못한 육신의 한계가 한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날고 무슨 일이든지 큰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슈퍼맨이 부럽고, 마음에는 늘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넘치는데 그렇지 못한 경제 사정이 아쉬우면 부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또 맘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늘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연약해서 버리고 싶은 인생의 한계 그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연약함,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도저히 경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여야 하는 동생 요셉과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와 같이 연약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육신의 능력을 초월해가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거나, 육신이라면 누구나 먹고 자야 하지만 그것을 참고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기는 것은 참 고상한 것 같지만 실상은 요셉을 팔아버린 마음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마음이며, 아담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마음입니다.



육신의 연약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인생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온전하다는 것을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것을 믿어야지, 인생이 가진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 인생의 연약함이 너무 좋은 것이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아주 아주 온전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그 형들이 자신을 버렸던 그 마음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비 야곱과 자손들을 구원하실 계획이었다고 고백함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연약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합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에 인생들이 볼 때 연약한 육신의 정체성이 너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든 한계를 십자가에서 보이시니 하나님께서 온전한 아들로 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셔서 죽음 가운데 두시지 않고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육신의 연약함은 요셉의 형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버리고 죽일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존재의 목적과 이유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 연약한 육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가진 한계를 벗어버리고 싶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영광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것임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진정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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