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머니즘은
신(神)을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신령, 정령, 사령 등)와 직접 접촉ㆍ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는 인물(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ㆍ종교적 형태로 나타난다.(《종교학대사전》, 샤머니즘, 한국사전연구사(1998년판))
라고 인터넷 위키백과에 나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미신적 활동, 예를 들면 굿을 한다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가지고 다니는 등의 행동을 샤머니즘이라고 지탄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사전적 의미에 보면 예언, 탁선(신이 내리거나 꿈에서 신이 나타나서 말을 했다고 하는 것), 복점, 치병, 제의(제사 의복?)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신과 접촉해서.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신접했다고, 귀신 들렸다고 하며 터부시 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의 세계는 왜 그렇게 신과 접촉하려 했을까? 그러니까 신과 접촉하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삶의 생사화복에 관하여 안정과 번영을 담보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며 걱정거리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육신으로는 그 소망에 자기가 바라는 수준까지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육신의 능력 이상을 빌어 자기 소망을 이루려는 마음에서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육신이 도모하는 일, 그것이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바라는 바를 어디엔가 기대하려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정립된 신론(神論)에 의하여 인정된 신에게 의지하면 종교가 되고 그렇지 않고 무당과 같이 정통적이지 않지만 세습되어온 민간의 방식에 의존하면 샤머니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명확한 것 같지만 엄청난 오류가 있다. 같은 문제를 어디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되거나 샤머니즘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범주를 보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문명적으로 발전하면서 종교학, 신학과 같이 신에 대하여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그것에 의지하면 종교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뿌리도 결국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의탁해 왔는데 그 체계를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스스로 세운 체계 안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탁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들 스스로가 세운 종교적 논리 세계에 따르지 않고 종교적 논리가 수립되기 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샤머니즘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종교나 다 같은 조상이고 뿌리가 같고 같은 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되었던 샤머니즘이 되었던 사람이 그것에 바라는 것은 모두 육신으로 사는 인생 한 세상 자기가 바라는 일이들이 육신에게 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는 것은 같은데, 그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종교 안에 있으면 좀 고상하게 보이고 좀 더 확률이 높다고 여길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확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종교적 개념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도 함께 발전했다. 그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나 샤머니즘이나 다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했더니, 아니면 무당에게 복채를 주었더니 부자가 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다 미신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사회과학적으로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병이 나으려면 의학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나 헌금이나 수행을 하는 것은 과학 입장에서 보면 도진개진인 것이다.
그러자 일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창조과학회와 같이 신앙과 과학을 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성경의 일을 증명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세상 친화적(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높은)인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확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어떤 신께 어떤 방식으로 인생의 문제를 의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학이나 신학이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예불하고 미사를 드리면 괜찮고, 그 범주가 성립되기 전 인생들이 의지하던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샤머니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신이나 무당에게 의탁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 부처님, 천주님께 기도하면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천주님이든 간에 가서 인생이 가진 문제,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신앙은 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네가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에게 제시할 공로와 소유가 무엇이냐?’와 같은 것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느냐 아니냐를 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정체성과 관계를 보시는 분이시지 육신의 문제가 무엇이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인 나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당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을 보자. 병을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는 것, 산신령이 노하시니 무엇이든 드리라고 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골격이 아닌가? 이것의 출발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답을 위해 육신의 무엇을 드리는 것으로 구성된 퍼포먼스인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샤머니즘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샤머니즘과 다른 것이 없다. 동일하게 육신의 문제를 사삼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 안에 가지고 가서 종교가 정한대로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이 그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나, 공양미를 내면 아비의 눈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나, 가서 주기도문을 백번 외우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것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없이 모두 자기가 믿는 신이나 신앙을 위해 육신이 가진 무엇을 드리면 육신의 문제 무엇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상한 샤머니즘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근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의 행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고, 제사로 드리는 제물 태우는 냄새도 싫다고 하셨다. 한 마디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또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행함이나 소유를 드림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산신령 같은 잡신 취급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인생이 존재하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서 취업이나, 사업이나, 결혼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기도하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헌금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마음에는 분이 차지만 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완성 사도신경 (2) | 2017.01.08 |
---|---|
성탄 인사 (0) | 2016.12.24 |
영성훈련, 신앙훈련 (0) | 2016.11.02 |
에덴동산의 미스터리 (4) | 2016.10.30 |
세상을 위한 기도,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0) | 2016.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