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제는 변질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겪는 변화 중에서 긍정적 변화인 성장이 아닌 부정적인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례가 흔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세계에 들어가서 생명을 맛본 사람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심지어 쌍둥이조차 각각의 성격이나 개성이 있다. 기술이나 스포츠 분야에서도 같은 것을 습득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이러한 것을 간략하게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것도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개성에 따라서 그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개성을 기반으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을 고유한 생김새와 개성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각 사람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표현될 때에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개성만큼 다양하게 표현되는 풍성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같은 복음이지만 바울 사도 안에서 잉태된 생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베드로사도는 그물을 던질 때 예수님이 불렀기에 삼천명을 회개시키는 역사가, 요한 사도는 그물을 꿰맬 때에 예수님께서 불러서인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묵상과 글로 표현하는 일을 한 것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복음도 각 사람이 가진 개성의 색을 띄고서 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이 그렇게 다양할 이유나 법이 없다면 사람은 획일적으로 같은 모습이면 되고,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오셔서 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가장 온전한 표준인 예수님이 계신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표준된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생명의 특성을 좇아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표현하는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여기 까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 복음의 상당한 경지를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기 안에 순종이 되면 다른 사람의 어떠함을 인하여 화를 내거나 불편해하거나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는 것과 자기 것이 되는 차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을 아는 자리는 아주 장성한 분량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어야 생명을 맛본 사람이 변질되는 이유와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는 것에 대한 세계가 열릴 수 있다. 각 사람의 다양함이 그리스도의 풍성함, 하나님 생명의 풍성함이라는 것을 알면 각 사람이 각자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까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가 옳다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상태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장성한 사람이 볼 때는 하나님의 섭리 중의 일부요 시작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생명이 생명다운 것을 수반한다. 각자가 가진 개성은 다양하지만 그 다양함을 가지고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것으로 승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의 개성을 고집하는 완고함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생의 본질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살 것인지에 대하여 자유롭게 하나님께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심과 같이 자기가 가진 개성과 살면서 형성된 독창성을 바탕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것에 치중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다양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개성을 낮추고 자신이 가진 복음의 확신과 개성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더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인지에 맞추어 내는지도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바울 사도가 비교적 초기에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들과 함께 있다가 유대인들이 온다는 소식에 자리를 뜬 것을 두고 불편해했지만 나중에 이를 화해했다고 하는 내용이 성경에 있는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입장에서 복음을 가졌다는 베드로 사도의 행동은 화가 날 수 있었을 수 있지만, 더 오랜 시간을 복음과 함께 살고 나서는 그것이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실라와 다투고서 나중에 다시 화해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복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성향과 가치관을 중심으로 복음을 표현하게 된다. 처음에 가진 성향과 가치관은 각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개성과 다양성 그리고 속한 사회 속에서 살면서 형성된 가치관 등이 어우러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외국어에 능통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신분이 다분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가 전 세계를 통치하던 시기에 유익했으며, 율법에 대하여 최고의 스승 아래서 공부한 것들이 유용했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섰고, 그런 자신의 가치관에서 볼 때 베드로 사도의 행동이나 또 자신이 영적으로 낳은 성도들을 대하였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고백했다는 것에서 복음이라는 것이 처음에 자기 성향 가득한 모습에서 온전히 복음의 본질적인 모습만 남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희석되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향대로 복음을 전했을 때 상대가 나타내는 반응들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복음의 능력을 믿고서 자기가 아는 복음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전개되는 상황과 사람들의 반응에 맞추어 자신의 복음이 아니라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믿고서 행하면 신앙이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을 향하고,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확장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복음이 전부인 것과 같이 살아가기 시작하면 필연코 그 신앙은 변질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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