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2) 에베소서의 수신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4. 23. 09:56 Writer : 김홍덕

이제 에베소서를 시작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고, 예정론이라고 말들 하는 말씀도 있고, 천로역정에도 나오는 전신갑주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에베소서의 주제를 축약하면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단 이 에베소서뿐 아니라 모든 성경은 신실한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신실하다(faithful)는 것은 신앙의 수준이 높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보다 나은 순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사본에 수신처가 에베소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수신자가 에베소 교회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본문에도 있는 의문, 곧 성경이 의문스러워서 아직도 학문(신학)으로 만들어 연구하는 하나님이 장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점일 것입니다.


성경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저자가 설령 특정한 수신자(예 데오빌로)를 지정하였다고 해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들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에베소서도 오늘 나의 이야기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은 기록한 사람과 읽는 사람이 같은 세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한 것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는 의미이고 ‘신실한 자들에게’ 라는 것은 신실한 사람이 수신자라는 것입니다. 즉 이 편지이자 성경은 성도이고 신실한 사람일 때 진정한 수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부르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제 아무리 에베소서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원어로 다 외운다고 해도 수신자가 아니지만 바울 사도가 의도한 것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된 사람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더라도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서신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 바로 신실한 사람이며 성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서신이 지역적으로 어디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라고 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 그것을 연구랍시고 하는 사람, 또 그것을 공부해서 시험치고 학위 따는 사람, 또 이 말씀대로 살아서 육신의 영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읽을 수는 있지만 수신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대부분의 바울서신이 그렇듯 시작과 함께 바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사도라는 것을 늘 천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성도들을 핍박했던 과거를 인한 것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인하여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인하여 그것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그런 조건에 있던 바울을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이 신실한 사람이고 또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바울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의심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은 육신의 어떠함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그의 말씀과 능력에만 기준을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의 어떠함을 보지 않고 말씀과 능력만을 보고 사람을 용납하고 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성도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울러 천명한 것이 바울 사도의 인사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은 어쩌면 면죄부 사건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학을 하지 않았다면 그 말씀의 온전함을 가늠도 해 보지 않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과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전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는지, 그가 어떤 신비한 능력을 행했는지, 그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지, 무엇보다 사회에서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지를 말씀을 전하는 자격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신학으로 공부한 사람, 바울 사도가 율법의 의문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들이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다고 천명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강도권과 같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권한을 만든 것이 그것입니다. 의문이 풀렸다면 공부하지 않을 텐데 아직도 신학교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신학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이 있어야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도 그렇습니다. 장로가 되려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장립식 때 헌금을 할 정도의 재력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이제 불문율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도 역시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을 열고 말을 하는 것에 자격을 부여하고 그 자격이 말씀을 전하는 권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핍박하던 자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싫어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당시 유대인들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사도로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의미인데, 그렇게 바울을 사도로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서 성도가 되고, 신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안에서도 자신은 옥에 갇힌 사람이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밝히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런 자신의 형편이나 과거나 삶에 무관하게 그에게서 나오는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어야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것이고 성도가 되는 것이며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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