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논할 때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모든 인생들은 이미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어떤 인생으로 살 것인지가 정해졌다고 보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것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a man의 삶은 이미 창세전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런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무엇이든 문자 그대로 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도 문자 그대로 a man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이미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모든 인생들을 그렇게 정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전도는 왜 하러 다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셨지만 그것을 알도록 알려야 한다고? 그럼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사람이 스스로 알게 할 능력이 없는 분이시거나 괜히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운명론적 예정론이 성경의 기본 말씀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운명론적 예정론이 사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악과를 만드시고 선택의 여지를 두셨다는 것도 항상 의문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운명론적 예정론대로라면 아담이 따 먹을 것을 아셨어야 하는 것이고, 그럴 값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사람을 시험하느냐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명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각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양에 대한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정하신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목적이자 의미요 본성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그 예정하신 뜻 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 뜻에 순종하여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살았다고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 사도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요일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 1: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말씀은 바로 ‘로고스’는 계획, 즉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만드시기 전에 먼저 뜻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표현되니 세상이 되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가지신 뜻, 그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서 나타나니 그것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 계획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예정의 유일한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삶과 운명이 예정되었는지를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계획을 순종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정녕 죽는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진정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여부는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늘 예로 들었듯 시계가 시각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의 예정이 태초, 곧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정해진 것이라는 것도 너무 밝게 열리고, 또한 우리가 어떤 예정하심 아래 있는지도 분명하게 열리며, 바울 사도가 또 성경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며 그 하나님을 함께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진정한 성도요 그리스도를 주를 섬기자요, 또 그리스도와 형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 그렇게 왈가왈부하는 예정이라는 의미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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