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편지는 빌레몬서와 같이 뚜렷하게 기록의 목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편지를 포함한 모든 편지의 내용은 수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보증이 깔려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대한 보증이라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들의 가진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 또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 안에 있는 생명 정체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증하므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위로와 보증과 은혜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증은 결국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가치에 반하는 것이기에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가치에 반하는 가치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순종하고 산다는 것은 일면 어려운 것이기에 이것을 상호 보증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생성 원인이고 교회의 근간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 속에서 세상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곤란하고 힘든 부분으로 보이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니 예수를 믿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와 안목과 생각과 가치가 자신의 본성이 되어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납하게 되므로 이기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 것이나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음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된 삶은 정말로 눈이 밝은 삶이 됩니다. 그것은 로또 복권의 번호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안목과 마음을 줍니다. 이치를 알게 하니 그것을 인하여 평안을 얻습니다.
때로 그 평안은 육신에게는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 정도가 아니라 순교를 당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도구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족과 같이 함께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에서 한 번 더 육신을 수고하는 종과 같은 모습이 본성을 인하여 나오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것까지 모두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이를 위하여 육신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 은혜의 척도로 여깁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을 다 모아서 요즘 자주 이야기하는 빅데이터 분석을 하면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집합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는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며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존재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동일한 개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기에 창조의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가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이 죄로 인하여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제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지만 천국도 엄연히 의가 있는 나라인데 그 의에 합당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이나 확신이 어떠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사람도 가정이나 일터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그 목적에 적합한 상태면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사용하고 또한 귀하게 대접하고 보관하며 관리합니다. 그러나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면 제 아무리 멀쩡해도 버리거나 팔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의이기 때문에 그 의를 가진 자는 어디에 있든지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앉히신다고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구원의 은혜는 말 그대로 은혜입니다. 사람이 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만든 목적을 가지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알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그것에 순종할 때 온전하며 평안하고 세상을 이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을 인지하고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렇게 순종하였을 때 펼쳐진 삶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모든 법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 법에 따라 세상도 사람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의와 뜻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 그 선택을 스스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는 로봇이나 기계나 아바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형상이 필요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삶은 태초 이전에 계획될 때부터 선물이었습니다. 단지 육신이 곤고하다고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신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육신이 살고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은 이것이 소비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입니다. 즉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고 약해는 지는 것이 본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구원의 은혜는 사람이 한 것이 없는, 아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셨으므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또 갚기 위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켜야 한다면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하고, 밥 먹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며, 십일조를 해야 천국 가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산다는 것을 설교하고 믿는 것은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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