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특히 그 중에서 사람에 대한 한결 같은 창조 목적 안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앞서 설명하였습니다. 사람도 엄연히 존재이므로 존재의 목적에 수렴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모든 관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한결 같은 의와 뜻 그리고 마음이며 역사하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스스로 알고 고백하고 순종하기로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곧 그의 의를 나타내는 자에게 그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계획이자 자신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 가진 존재로서의 삶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순종할 수밖에 만들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순종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심지어 그런 개념조차 없이 행하는 것은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신 분이신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인생이 기계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선택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인생이 하나님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선택을 하는 모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운 이유는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선악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도 그것에 대한 말씀을 어기고 맘대로 따먹은 사람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과를 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접근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게 해 놓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 사람들이 선악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대표적 관점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 설명한 것과 같이 선악과는 어떤 과실이었겠지만 그 과실의 어떤 특별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상징적 의미입니다. 선악과는 사람의 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심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꼬임과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는데 막상 밝아져서 보게 된 것이 자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 육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과 같은 말로 대변되듯 인생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무엇을 악한 것으로 판단할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권을 가지려고 한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것은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 자체가 그것의 창조자와 자신을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생,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자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순종할 것을 결정하는 선택의 권한을 탈취하고 스스로 인생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려 한 것이 타락의 시작이고 모든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바로 이것입니다. 허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육신을 가진 자기 삶에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모든 죄와 타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간첩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간첩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은 어떤 것 예외 없이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하다 죽어도 간첩이요 국가에 대한 범죄자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보이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삶의 의미가 자기 안에 없다면 그 어떤 삶을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위로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성경의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는 알지 못한 체 인생을 어떻게 선하고 의미 있게 살까 고민하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자기 삶을 어떻게 살까 계획하는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성경을 모두 지켜내면서 산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로, 자기가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라고 외쳐도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의 본질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시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그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자기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자 능력을 가지고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또는 다른 신을 기쁘게 하는, 혹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는 그 시도의 시작 그것이 바로 인생의 허물이고, 죄의 시작이며 죄와 타락의 전부이며 사망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알게 하시므로 모든 인생의 주권이 유일한 창조주요 신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 어느 것에도 사람이 한 것이 없으므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살리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면 그리스도가 있어야하기에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그것을 본 사람이 이때까지 자기 인생이 자신의 것인 줄로 알고 살다가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게 되는 그리스도가 되기에 다시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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