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보면 의외의 말씀이다 싶을 정도의 말씀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간구의 시작 부분인 에베소서 3장 14절에는 “하늘과 땅에 속한 족속에게”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간구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인데, 하늘과 땅이라는 양 끝단에 속한 사람이 있음을 언급한 반면 그 두 대상 모두가 간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땅으로서는 불과분의 관계이지만 하늘은 사실 입장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땅은 하늘의 어떠함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하늘은 땅이 어쩐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하늘의 뜻에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라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하늘은 뜻을 가진 곳입니다. ‘하늘의 뜻’이라는 말은 상용화되어 있지만 ‘땅의 뜻’이라는 말은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면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땅은 뜻이 없습니다.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지 뜻이나 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쉽지만 다음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바로 땅이라는 것,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괜히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람이 땅이라면 사람이 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란 로봇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앞에서 땅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고 성취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늘에 속한 족속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족속을 말하는 것이고, 땅에 속한 족속은 땅의 뜻 곧 사람의 뜻이 삶을 주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이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공중에 거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의와 뜻이 하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 있어도 대한민국 헌법의 의에 속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말 그대로 하늘의 의가 땅에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이유가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 곧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속했다고 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땅에 속한 족속은 땅의 가치가 자신의 의와 뜻인 사람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세상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인 사람이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니 자신도 그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좇고 있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에 닿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체성과 전혀 맞지 않음에도 세상에서 상을 받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모이는 사람들은 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거대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두 피라미드 위로, 바벨탑을 더 높게 쌓으려는 땅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한 가운데 몸을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 속한 족속들의 혈통이자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의 간구에는 땅에 속한 족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기를 구함에 있어 땅에 속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이방인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방인이라고 지칭한 사람이 바로 땅에 속한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족속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의와 뜻이 되었으므로 하늘 곧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교회에 다니든, 유대교를 믿든, 알라를 믿든, 부처를 믿든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땅에서 가친 있는 것을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이루려는 사람은 다 땅에 속한 족속이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이방인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또 하나님의 복음을 가진 사람이 바울 사도가 말씀한 땅에 속한 족속 곧 이방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자신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 현상이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산에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사람들, 먼저 하늘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그 신앙이 자라 장성하게 되면 자신이 하늘에 속한 이유가 땅에 속한 족속 곧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이기적이다가 자라면서 이타적인 것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원래 속에 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원 의미가 ‘속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외부 수혈이 아니라 자라는 것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게 장성하면 할수록 땅에 속한 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먼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늘은 땅에게 뜻을 보이는 것이니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뜻을 언제나 땅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뜻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먼저 가졌고, 더 온전한 것을 가졌는데 그것의 내용을 보니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여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땅에 속한 족속을 위해서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더 가졌는데 종이 되는, 그래서 세상에 없는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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