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는 그리스도는 씨 있는 채소을 먹고, 씨 가진 열매를 먹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땅에서는 풀과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이 나와서 그 열매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내어 놓은 사람의 삶과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고, 또한 그런 사람은 그것을 다시 내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유기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이런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며, 이 교회에 대한 것이 이 블로그의 최종적인 목표 중의 하나이므로 그것을 차차 다루도록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은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적 심판의 기준에 의하여 죽고, 그것을 본 사람은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본다면, 세상적 가치를 상징하는 바다에서는 살 수 없어 드러난 땅,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뱉어 버린 땅에서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상적인 가치기준을 가진 로마의 법과 형식에 찌든 유대인들의 법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과 같은 말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는 말씀이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된다는 것은 바로 씨가 땅에 심기운 것과 같은 것이다.
흙인 사람에게 농부가 흙에 씨를 뿌리듯 사람의 심령 안에 심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씨>
그래서 하나님은 농부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인 사람에게 농부가 흙에 씨를 뿌리시듯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싹트고 장성한 나무가 되어서 굳이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심겨진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성경에 <'하라(Do)'>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정확히는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기록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씨다. 그 씨가 바로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씨 있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에 나오는 씨다. 그 씨는 다른 씨가 아니다. 흙으로 지으신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오게 되는 씨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모습이 백부장이라는 사람 안에 씨와 같이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열매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으면서 그 백부장에 관한 말씀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에 나오는 <씨>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씨는 그리스도라는 씨앗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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