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느냐를 생각하는데 있어 큰 벽과 같은 대표적인 말씀이다. 특히 ‘항상’과 ‘범사’가 문제가 된다. 기쁠 때 기뻐하고,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좋지 않은 일이 마주했을 때 문제가 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고, 그리스도로서 산다는 것은 그 말씀을 다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므로 이런 말씀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을 늘 심판한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성경에 분명히 있는 말씀을 예수님처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의 근본적인 모순에 빠지니 것인데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에서 벗어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신학적 요인이 크다. 사람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는 괴변이 자신이 겪고 있는 엄청난 모순과 문제의 해방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일기와 같아진다는 것은 너무나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고 해도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과 본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 거듭난 사람의 삶이라는 말은 거저 부인하고 싶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로 시비를 건다. 정작 필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그 세계를 알려고 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떤 시대가 되어도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을 대하는 낯설음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나사렛에서 난 천한 목수의 아들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다가 성경 몇 마디 지혜롭게 가르치고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 말처럼 낯설 것이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나, 연약하고 실수만 하는 육신 가진 사람이 성경을 지킬 수 있다는 것 모두 어이없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다 지켜야하는 말씀임은 틀림없다. 신학이든 어떤 괴변이든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이나 거듭남은 어림도 없고 오히려 그렇게 두려워하는 지옥에 가는 일만 남은 삶인 것이 성경의 근간이다. 사람이 성경의 뼈대와 논리적 투쟁을 하고 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성경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나? 그런 것은 다 자기 합리화적 괴변일 뿐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신앙이 아니다.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람의 한계와 능력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성경을 지키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다 아신다는 것도 믿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태연하게 믿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 모든 것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분명히 아신다. 그와 함께 사람을 지으셨으므로 사람에 대한 모든 기준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어떤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죄와 사망에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떤 것이 사람의 기쁨이며 감사인지,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준, 곧 법과 표준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 그리그 그 하나님의 의와 뜻과 법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과 법이 육신이 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님을 통해 보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것은 분명히 성경대로 살 수 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성경을 다 지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없다. 모든 순간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을 좇아서 기뻐하는 것은 할 수 없다. 어떤 순간에 상황판단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마음에 기쁨이 없음에도 말씀 때문에 기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기뻐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마저도 사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법이 있다. 항상 기쁜 존재로 나면 된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하나님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십자가가 기쁜 일은 아니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았다. 육신을 가지신 분이 기쁜 일을 땀이 피가 되도록 피하고 싶을 리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기쁨을 예로 들어 계속 설명하면 당연히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아픈 가족이 회복되는 것과 같은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육신의 일은 세상의 안목으로 기쁘지 않게 흘러도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기쁨이 될 수 있다. 그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세상의 안목으로는 절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일이 기쁜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신다. 이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그렇게 낯설었던 것은 나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단 기쁨만 그런 것이 아니다. 평안도 그렇고 감사도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육신과 세상의 안목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지킨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지킨다는 것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본다.
더 터무니없는 것은 자신들이 정한 기준 곧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높은 곳에 두고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을 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경을 지킨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가치관 속 그리스도는 당연히 높아지는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성경대로 사는 것은 말 그대로 <삶> 곧 생명의 세계이므로 그리스도로 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 되는데 노력이 필요한가? 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다. 사람으로 나면 사람의 유전자대로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고,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삶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있나? 오히려 지키지 못하는 것이 신기한 것이 된다. 그게 바로 그리스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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