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대로 산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2. 23. 14:31 Writer : 김홍덕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지켜낸다는 것에 있어 성경을 행간을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맞다. 문제는 성경을 행위로 지키느냐 존재로 지키느냐의 문제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타협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망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답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관점과 생각이 모든 이론과 현실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이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의 첫 걸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경을 지키는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산다는 것은 분명히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므로 성경을 지키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거듭났다고 주장해도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신앙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잠깐 심청전을 이야기 해 보자. 심청전이란 소설은 부모님에 대한 효()를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렇다면 심청전이 이야기 하는 효도는 바다에 빠지는 것인가? 심청전을 읽고 효자, 효녀가 되려고 심청전이 말하는 것을 지킨다는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행여 주군가가 부모님께 효도를 하려면 어딘지 모르는 인당수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심청전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당연히 성경도 그런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봐야 한다.

 

성경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배경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다 믿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그리고 한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아신다는 의미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계명을 주고서 어떻게 하나 보고 즐기는 고약한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배경이다. 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예수님은 화도 내시고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정말로 침울하셨는데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율법을 어기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켰다고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과 같이 행위로 성경을 지키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보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자곧 그 존재가 기쁨이 되는 분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퀴즈와 답으로 알 듯 하지만 스스로 있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사람과 세상의 모든 만물의 가치관 너머의 개념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누구를 대할 때 무엇을 했느냐(하느냐)?’가 관점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외모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본성을 모든 성경을 통해 늘 보이신다. 대표적으로 아담이 범죄 했을 때를 보자. 하나님의 영을 어긴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왜 내가 하지 말라는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이것은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물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외모와 형식을 보시는 신으로 보는 것에 매몰된 구제불능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이제 나는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는 것에서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며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의로 여기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서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본질로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관점은 거듭남에 대한 뿌리다. 거듭난다는 것은 존재가 바뀌는 것이지 행동이나 방법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 곧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던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부터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다.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겉모습의 하나인 방법만 바꾼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당연히 성경을 지킨다는 개념도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존재가 바뀌지 않았는데 존재에 종속된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면 분명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예수님과 같아 질 수 없으니 예수님 같이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어떤 존재이기를 바라시는지를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려면 근본적으로 성경이 의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성경이 다 이루어진다. 성경이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라라고 읽히는 모든 행동들, 그래서 사람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그 표현들은 모두 존재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행동은 존재 이후에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행실을 행하려면 먼저 성경이 원하는 존재, 곧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행위 규범이 자신에게서 나온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 행위보다 그 사람의 어떠함을 보신다. 원하는 존재가 된 사람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하게 여기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여기신다.’라고 하니 합당하지 않은 것을 합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그런 기만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온전하게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본성에 맞다는 의미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준행하려고 노력하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처럼 되는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의 일기와 같다. 거듭난 생명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이 어떤지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기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기록해 놓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지키는 법은 다른 것 없다. 예수님과 같이 거듭나는 것뿐이다. 당연히 아직 노력하고 있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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