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을 끊어버리는 귀신 들린 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쇠사슬도 끊어 버릴 정도의 괴력을 가졌다는 건 사람이 하나님 혹은 신에게 자기 능력 이상을 간구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귀신 들렸다는 것과 한계 이상의 능력을 구하는 건 같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특성이다. 사람이 자기 능력 이상을 추구하는 게 언뜻 정상 같지만 그게 선한 일이 되면 사람을 명확한 한계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악이 된다는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능력 = 기적을 바라는 사람의 마음
사람이 자기 능력과 한계 이상의 도움을 얻으려고 신을 찾는 건 비단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의 마음은 아니다. 신을 찾는 사람의 심리의 기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보고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로마 식민지로서의 고통과 가난과 같은 민생 해결을 기대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경쟁에서 자신들에게 더 나은 결과를 주실 것이라 믿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항상 사람의 일에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진다고 믿는 게 그렇다. 심지어 그게 좋은 믿음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시고, 해방을 기대했던 로마 총독에 의해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시던 능력을 뒤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삶의 문제에 있어 쇠사슬을 끊어버리듯 기적을 행하고 체험하고 열광하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란 의미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오히려 그런 마음을 버리는 변화를 이끄시는 능력이다.
따라서 자신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한편으로 기적을 행하고 체험하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반추해 봐야 하는 말씀이다. 분명 자기 신앙 안에 그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이 육신을 주관하는 귀신 들린 자가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봐야 하는 이유다.
예수님의 치유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치유를 살펴보자.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기 전엔 이 귀신 들린 자와 같고, 또 믿는다고 하지만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이기게 하는 예수를 믿는 사람 역시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치유가 자신의 치유여야 한다. 그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치유 장면은 귀신이 예수님과 협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화도 하고, 요구도 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했다. 귀신의 수가 많다는 의미다. 귀신의 이름 곧 정체성이 군대라는 건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은 군대처럼 수많은 가치를 좇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 군대 귀신은 자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길 청한다. 돼지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삶이 되지 말라는 의미로 먹지 말라고 한, 즉 하나가 되지 말라는 가축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다. 군대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 들어가는 것으로 귀신 들린 자는 치유되었다. 사람을 주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들어간 것이다.
귀신은 사람을 주관하지 말아야 할 가치, 돼지는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되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모습의 상징
이런저런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하는 말로 ‘하지 않을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가치도 그렇다. 사람은 수많은 가치를 좇지만 있어야 할 단 하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귀신 들린 자일 뿐이다.
군대 귀신 들린 자처럼 수많은 가치를 좇고 살지만 정작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만나고 따라야 하는 단 하나의 가치는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사람에겐 인생의 의미다. 그 하나만이 사람을 주관해야 할 온전한 것이다. 그 하나가 없다면 아무리 수많은 가치관을 좇아도 귀신 들린 자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심한 귀신에 들린 게 된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니 회복된 것은 주관해야 할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가치관은 돼지와 같을 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삶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게 치유의 모든 것이고, 이게 구원의 본질이다.
군대 귀신 치유의 본뜻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군대 귀신에 들렸다고 표현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많은 가치를 좇고 있다. 평생 많은 가치관을 추구하나 결국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죽는 사람의 모습이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다. 사람이 이처럼 많은 가치관을 좇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란 낮은 자리로 이끌어 그 뜻을 보이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늘 이기고 높아지려고 하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그런 수고와 짐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십자가는 우리 눈에는 참혹하고 피하고 싶은 것인데 따라오라고 하신 건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라는 의미다. 본성은 생명에 종속된 것이므로 그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태어나야 가질 수 있다. 이게 군대 귀신으로부터의 온전한 치유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보고 그것이 또한 나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목적을 삼으면 수많은 가치를 좇으며 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못했던 삶에서 회복된 구원을 얻는다. 이게 예수님의 구원이다. 단 하나인 이 구원의 법을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치유를 통해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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