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광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일은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그리고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 본문으로 적어도 한 번 이상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설교 내용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은 인생을 살면서 광풍과 같은 세상 풍파를 만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구하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성경의 주제나 흐름은 흔히 듣는 설교의 주제와 궤를 같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세상의 풍파를 잠잠하게 한다는 걸 믿으라는 게 이 이적의 본질이 아니란 뜻이다. 이유는 예수님은 강제로 죽임당하는 세상 풍파 앞에서 끌려가셨다는 게 가장 핵심이고, 삶의 풍파의 뿌리는 모두 의식주에 있는데 예수님께선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문제이므로 사람이 걱정할 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 세상 풍파의 대표인 가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선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책망한 제자들의 믿음, 없다고 하신 믿음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풍파를 해결하신다는 걸 믿는 믿음이 아니다. 이게 보이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고 있지만 의도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예수님을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자기 삶에 혹시 닥칠 불행의 예방이나 꿈꾸는 일의 성취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이적을 가지고 세상의 풍파는 예수님께서 해결하시니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설교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광풍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건 분명히 세상의 풍파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 건 맞다. 문제는 책망이다. 믿음이 없다는 책망 속 ‘믿음’이 문제다. 왜냐하면 광풍과 풍랑은 예수님께서 평안히 주무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세상의 풍파는 두려움이나 안식을 깨는 요소가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평안을 깬 것은 광풍이나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이었다. 이걸 주목해야 한다.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건 광풍과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
세상의 풍파로 대변되는 바다의 풍랑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패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풍파가 자신을 삼키는 걸 두려워하는 건 성공과 평안에 대한 삶의 기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에 휩쓸려 가듯 살게 될까 염려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사람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세상의 패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리고 우린 그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거나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의 풍파를 예수님께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게 온전한 믿음이라 생각한다. 이건 믿음이나 신앙의 영역 이전에 상식의 영역에서 이미 모순이다.
앞서 주목해야 한다고 했던 것, 예수님을 깨운 건 광풍과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이란 걸 또 생각해보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독립의 문제는 물론이고 가난과 질병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겐 예수님과 함께 해결해야 할 세상의 문제가 자신들을 죽게 할 수는 없었고, 또 자신들의 믿음이 이루어지기 전에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님께선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세상의 풍파를 자신에게 의지하는 오늘날 신앙인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사람은 세상 풍파를 만났을 때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찾는 게 믿음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생각을 믿음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풍파가 두렵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미 파도가 치고 있는데 주무시고 계셨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 풍파를 두려워하여 평안히 쉬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깨웠으니 책망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세상 풍파를 예수님께 의지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걸 구원으로 믿는다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그게 구원이란 것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전한 말씀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처럼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평안한 삶을 산다는 믿음이고,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풍파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믿는 믿음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세상의 패배자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요 우리도 그와 같아질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세상일 해결을 돕는 주님으로 믿는 게 아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세상의 풍파를 두려워하여 세상 풍파 앞에 평안한 그리스도를 깨우고 의지하는 건 믿음이 없다는 걸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므로 보여주셨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세상의 패배자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요 우리도 그와 같아질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참 잘못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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