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고향으로 가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권능이 그곳에서 소용없었다. 예수님께선 그 이유가 선지자가 고향에서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4)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을 언급하며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예수님을 정의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너나 나나 별것 없는 존재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의 놀라움보다 예수님 육신의 신분이 더 중요했다. 한 마디로 내용보단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이다.
사람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그 속에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껍데기밖에 없으므로 내용을 볼 수 없다. 이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사람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의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담을 그릇이요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창조된 사람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없으면 모든 걸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서 생명이 된 사람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걸 보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존재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학력이나 재력이나 신분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육신의 품행이나 경건한 모양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다는 하는 건 같은 본성이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니 하나님께서 벌주신 거다’, ‘신권으로 헌금하면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처럼 육신의 모양, 행세, 공로와 업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상이나 벌을 주신다는 생각은 분명 겉모습이 기준이다. 말씀 선포에 목사 같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표적 현상인 셈이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그랬다. 목수 주제에 놀라운 말씀을 전해봤자 목수의 말일 뿐이라는 그들의 가치관이나 목사가 아니면 설교할 수 없다는 건 완전히 같은 가치관이다. 그런 가치관에 동조하는 신앙인들 역시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건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없는 외식하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무력화된 구원 없는 신앙임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심령에서 생명이 되게 예수님 말씀이 아무런 권능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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