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방언과 예언 통역과 묻고 답하는 일이까지 권면을 이어간다. 핵심은 질서를 수반한 화평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한다. 방언과 예언만이 아니라 성령의 모든 은사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본질을 계속 말씀하고 있다. 이는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상의 위함이나 은혜는 있을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방언하는 둘 셋이 모여 말하고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고 했다. 방언을 하거나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 뜻을 알기도 분별하기도 힘들다는 걸 알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방언은 앞서 이야기했듯 이상한 언어 같은 방언이 아니라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듣는 것이다. ‘기도’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육신의 안목으로 신앙을 보는 사람은 육신의 복락을 구하는 것으로 말하고 들으며,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의 뜻이 자기 삶을 주관하기를, 또 자신은 순종하기를 구하는 것으로 말하고 듣는다.
성령의 은사는 이와 같이 사람을 위한다.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 인생의 목적과 삶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돕는다. 하나님의 영이시니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을 창조의 목적대로 이끄신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고 직임이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은사와 능력과 역사는 이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언을 순서대로 한 사람씩 하라는 말씀과 통역과 함께 방언을 말하므로 사람들이 배움이 있게 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이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가 전하는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본성과 직임과 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바로 안다면 뭔가 질서를 지키라는 말씀처럼 보이는 이 말씀들의 본 뜻도 결국 성령의 뜻대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절대적 유익을 위하라는 말씀이다.
앞서 은사와 직분을 설명함에 있어서 한 몸과 그의 지체를 비유한 것이 그렇고, 성령은 한 성령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말씀을 했다는 것을 잘 이해했다면 예언과 방언과 통역을 비롯한 모든 은사가 한 성령의 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능력이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 성령의 하시는 일에 질서가 없을 리가 없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은사에 대해 제법 많은 설명을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성령의 은사를 사람이 크게 오해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설명하듯 성령의 정체성과 직임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 분명히 알아도 성령의 은사를 분명히 알고 오해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의 모든 권면이 거듭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성령의 모든 은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람의 유익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만큼 어둡고 답답하고 암울한 게 없으므로 이것을 밝히는 것 보다 더 사람을 위하는 건 없다.
성령은 이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이 결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이 온전한 성령의 은사는 사람에게 배움을 주기에 유익한 방법으로 행하신다. 필요하면 차례차례, 또 필요하면 통역과 같이 설명으로 행하신다. 일만마디 방언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한 마디로 임하시는 게 성령이시고, 성령의 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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