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사를 덕을 세우는 것과 남을 위하는 일에 쓰라고 권면한다. 이유는 은사의 주체인 성령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를 이와 같은 성령의 본성과 상충되게 신앙의 우위 혹은 더 좋은 신앙으로 간주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을 기조로 분열하거나 더 좋은 신앙이라는 착각이 대접받게 된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의 관점과 사뭇 다르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의 의미도 다르다. 병 고치는 은사로 아픈 사람을 고친 일을 예로 보면, 예수님께서도 또 사도와 선지자들도 그렇게 아픈 사람을 고쳤으니 남을 위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 일로 나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또한 바울 사도가 전한, 무엇보다 예수님이 전하신 그리스도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이고, 복음 속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육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시키는 존재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졌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본성이 그렇다. 그래서 생명이고, 그래서 거듭난다고 한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각 은사의 개요 역시 이 관점에서 봐야 한다. 육신의 일을 예언하는 게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람에 따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지를 전하는 게 예언인 것처럼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일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는 건 노력으론 되지 않는다. 신학 같은 것으로 어림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된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니 그 안목과 관점이 바로 그리스도로써,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성령의 모든 은사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서 비롯되고 성령의 가장 본질적 직임이자 능력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니 너무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성령을 보는 유일한 하나님의 관점이다.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더더욱 당연한 이치다.

 

이런 관점이 있다면,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성령의 은사를 우리 몸에 견주어 몸의 각 지체로 설명하는 건 아주 훌륭한 설명임을 알게 된다. 우리 몸의 어느 지체라도 나의 자아가 지향하는 바를 협력하기 위해 자신의 수고를 내어 주기 때문이다. 본다는 건 눈이 종 노릇 한다는 것이고, 걷고 달린다는 건 다리와 발이 종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가 이렇다면 복음 안에서 직분 역시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영이 행하는 능력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서 맡은 직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은사도, 하나님의 직분도 아니다. 또한 은사와 직분이 이와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삶과 박리되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도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쟁점이다.

 

직분이 당회처럼 어떤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거나, 교회 학교의 부장이 되는 조건이라면 그건 남을 위한 게 아니다. 설마 당회원과 교회의 부장이 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로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아마 모르긴 해도 당회의 논의는 교회가 세상적인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논의할 것이고, 교회학교는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건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의 대척점에 있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서로를 배척하거나 몸을 위해 더 나은 지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게 바울 사도 비유의 내용이다. 은사나 능력도, 교회의 직분도 바로 우리 몸의 지체가 가진 것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성령의 은사고 하나님 나라의 직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역사를 위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더 큰 능력을 보이겠다고 하고 사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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