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Ⅲ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0. 15:54 Writer : 김홍덕

영원한 신앙의 유혹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 세 가지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쩌면 영원한 신앙인의 시험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고로 신비롭고 기적이 있거나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떡으로 만든다는 것은 돌에 새긴 율법을 사람이 다 지킬 수 있게 하라는 이야기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극복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물과 불이 나오는데, 물은 말씀을 예표 하는 경우가 많고, 불은 기적을 예표 한다. 성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모세이다. 그는 시내산에서 직접 하나님께 돌판에 새긴 율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름 자체가 ‘물에서 건진 자’라는 의미이고, 큰물을 건넌 지도자였고, 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운명에 거하게 되는 선지자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모세 = 율법, 그리고 물의 선지자 하면 모세를 떠 올린다.


반면에 불과 기적의 선지자라고 하면 또 단연 엘리야이다. 그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상대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는 죽은 사람도 살리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서 오늘날에도 엘리야의 때와 같이 라고 찬송을 부를 정도로 그는 이적을 대표하는 선지자요 불로 대변되는 선지자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전혀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만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가셨었을 때에 두 사람이 나타나서 변화하신 예수님과 함께 만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 17, 막 9, 눅 9) 그 광경이 얼마나 좋았는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라고 소리치게 된다. 하지만 곧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여 눈을 떠 보니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사건이 바로 변화산 사건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실 그 때에, 산 아래에서는 어떤 귀신 들린 아이를 그 아비가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하며 말하기를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5)”라고 이야기 하나,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 위에서는 베드로가 율법의 선지자요 물의 선지자인 모세와 기적의 선지자요 불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어떤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져서 고쳐달라고 하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 대칭이 되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늘 예수님을 믿는 것에 엘리야와 같은 기적이 더하여 지면 좋은 것이고 더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긴다. 또한 모세와 같이 율법을 잘 지킬수록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긴다. 요즘은 복음의 시대인데 누가 율법을 잘 지키겠냐고 하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그 공로가 인정받는 모든 것은 율법의 세계이다. 사실 큰 교회에서의 주일 성수와 같이 지켜야 신앙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이 다 율법이다. 생명의 세계라면 금해도, 하지 말라고 협박해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생명의 세계 아닌가? 개를 ‘야옹’소리 내게 할 수 있는가? 그것처럼 도무지 예배를 빠질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생명의 세계이나, ‘안 오면 죄야, 하나님께 혼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율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킬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엘리야가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세계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임신했는데, 아들일 줄 믿는다고 기도했다면, 설사 딸이 태어나도 아들로 바뀔 것이라고 믿어야 믿음이지, 딸이 태어나면 자신이 믿고 기도했던 것은 헌 고무신처럼 던져버리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큰 교회에서는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을 신념으로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 착각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주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겨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착각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없는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기적을 바라는 신앙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그 때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외치는 소리를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볼 때 저렇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려 있다면 엘리야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바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들이 죽지 않게 받쳐 줄 것이라고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과 그 세계가 같은 것인데, 일상의 생활 중에서도 ‘믿는 사람한테는 그런 일 없다’라던가, ‘어머, 믿는 사람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고?’하는 생각들이 다 기적을 바라는 그리고 기적이 있는 것이 신앙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마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그때 산 밑에서는 간질에 걸려 불에 넘어져도, 물에 넘어지는 아이를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고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머리가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칠 수 없었다. 산 위에 있는 베드로나 그들이나 다 같이 예수님 더하기 엘리야 그리고 모세가 좋다고 여기는 마음이나, 머리를 뺏겨서 불과 같은 기적으로 고쳐보려 불에도 넘어지고, 또한 율법으로 고쳐보려고 물에도 넘어지는 귀신 들린 자나 그 신앙적 안목과 마음이 같은 마음인지라 고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기적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말씀을 잘 지키면 좋겠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귀신 들린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떠난 사람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도, 율법의 선지자 모세도 아니며, 또 예수님 + 모세 + 엘리야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을 떡으로 만드시지도 않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라 여기시지 않는, 즉 율법을 지키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초막을 지어 함께 하듯 부가되는 것이 아닌 그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서 연약한 육신의 모습 그대로 죄인으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신 것이다.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은 그와 같은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처럼 변화산상의 베드로의 마음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만들어라’는 것이며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기적이 함께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는 그 마음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마음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만의 마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의 영원한 시험이고 유혹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초대교회에도 그치지 않아서, 결국은 육신을 부인하고 천사를 숭배하거나 아니면 영지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또 골로새 교회와 같이 같은 값이라면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 더 교회의 지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모두가 이 시험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 안에서 이러한 유혹은 언제나 끊이질 않는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으면 좋겠다.’라던가 세상적인 Spec.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더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이 유혹은 정말 정말 끊이지 않는 인생의 시험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있는 간구인 것이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번 하려고 자신의 삶을 늘 되새김질 해 가다 보면 우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바라며, 또한 신념을 얼마나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는지 놀라운 정도이다. 그렇게 신념으로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기적이 있어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아는 것이 바로 인생의 끊임없는 유혹인 것이다. 필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 마음 속의 유혹과 싸우고 싸워 왔다. 그리고 이것은 늘 기도해야 하는 우리의 기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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