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rd Temptation
예수님이 받으신 마지막 시험은 마귀가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하심으로 물리치게 되고, 이어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들었다(마 4:10)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세 번째 시험은 누구에게 절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시험은 무엇을 진정한 본질이라 여기느냐? 하는 질문이자 유혹이다. 절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며 근원이고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창조한 대상 혹은 그것이 자기 삶의 근원이라 여기는 것을 경배하고 그것을 신으로 삼고 기도하고 경배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마귀가 하는 시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임을 인정하면 네가 본질로 여기는 이 모든 것은 네 것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절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경배의 목적이고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의 근원은 보이는 물질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며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본질은 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험의 내용이자 목적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질에 대하여 헷갈리고 유혹을 받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고 그것이 영광이라 여기기에 그것에 쉽게 절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질은 하나님이시지 세상 만물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본질이 되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히 11:3)”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골로새서에서 바울사도는 “만물이 다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하셨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책에 적힌 글씨가 본질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본질이다. 심청전에는 효도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본질은 효(孝)인 것이다. 이렇듯 보이는 것과 본질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앙하고 경배한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좇아간다. 그것은 결국 그러한 것들을 경배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경배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답변을 하셨다. 이것은 또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서 고백되어져야 하고, 다음은 온 세상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게 복음 전파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실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은 본질을 표현한 형식이고 표현 양식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동차도 본체라는 형식이 있고, 이동과 운송이라는 내용이 있듯, 컴퓨터도 하드웨어가 있고, 소프트웨어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계산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것은 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 중에 이것에 대하여 예외인 것은 없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 즉 본질이 있다. 그래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본질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형식의 본질,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뿐이기에 이 모든 세상이 형식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본질인 나라는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만물이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된 것은 하나님과 세상, 세부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이 그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법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용이시며, 의를 가지셨으며, 목적이시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더 정확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중에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듯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충실히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어둡다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맹인을 고치신 것은 육신의 눈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러신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맹인인 사람이 세상을 보지 못하듯, 영적인 맹인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심으로 무엇이 본질인지 똑바로 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끊임없는 시험이다. 사람이 눈만 뜨면 보이는 세상에 늘 속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이김을 위하여 이기셨고, 또한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긴다. 큰 교회들은 더 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꾸며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는 반대로 마귀에게 유혹당하고 패배한 것 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연약한 인생들은 예수 잘 믿을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비판하며 개독교라 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하신 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큰 교회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믿기 때문이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정치적 왕이 되어서 오늘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올 것이라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도무지 어디 계신건가? 그래서 큰 교회들이 예수님은 없는 십자가만 부적처럼 앞에 달아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세상에서 성공한 왕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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