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26-31)
회심한 사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의심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기 위한 기만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사울은 더욱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증명했고, 다메섹에 있는 많은 유대인이 그에게 설득됐다.
이런 사울의 변화는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잡아 죽이려 하므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사울은 기존의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이때 이를 중재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다. 바나바는 마가로 인해 바울과 다투기 전까지 늘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사울, 곧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다. 그건 역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게 하나의 성문(成文)이 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물론 그 의미를 알고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더욱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데 앞장선 사울이 이걸 전한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은 건 예수님의 신분과 행실 때문이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며, 성전을 뒤집어 놓고 기존의 율법들을 무시하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겐 그리스도다운 구석인 정말로 "1"도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그들 눈에 예수님은 악질 신성모독범일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그들이 잡아 가두거나 죽이지 못한 건 백성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대하는 백성들의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히시니 백성들마저 예수님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고, 이에 힘을 얻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게 예수님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하는 건 용납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그냥 사이비종교 취급하면 되겠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즉 신성모독이나 반역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죄였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다는 건 여러 가지 자격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12 제자에 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하곤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격이 곧 사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의 자격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사람이 곧 사도다. 사울(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는 건 어떤 다른 자격을 인함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전했기 때문이다.
사도의 자격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전하는 것
오늘날은 목사들이 사도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자칭타칭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격은 시험과 학력에 있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전하는 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황금 마차를 타는 예수라는 것이다. 강단에 서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죄인인 예수를 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성공을 담보하는 예수를 전하고 있다. 그런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가 아니다.
굳이 당시의 상황을 대입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 그래서 죄인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당한 예수를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을 받는 것인지도 명확해야 하고, 예수의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어떻게 앞서 말한 구원을 얻게 하는지 모든 게 명확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분명하고 밝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자기도 명확하게 모르는 걸 남에게 인생을 걸고 믿으라고 전하는 건 사기지 전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 사람과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요 죄인인 예수가 세상의 곤고함에서 성공으로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 존재의 정체성을 밝히는 구주라는 걸 믿고 그걸 전한다면, 신학을 하지 않아도, 가운을 입고 강대상에 서지 않아도 사도다.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사도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은 것 역시 그랬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전하니 그가 사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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