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나이 75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고 또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린 아들을 100세에 얻었다. 이것을 두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불러서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얻기까지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듯이 위치의 이동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도의 어떤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안목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안목이라고 했다. 그 안목은 율법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한 것은 상태의 이동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상태, 곧 정체성을 조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말씀하신 거서이다. 사람이 바벨탑을 쌓듯이 위대함으로 하나님(하늘에)께 이르려고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땅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자리로 가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 곧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하는 이를 얻기까지 자신의 가치관, 정체성, 안목을 바꾸어내는 여정이 바로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자라면서 세상이 가진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은 육신의 능력으로 이긴 자가 선한 자가 되는 세계이다. 바벨과 같이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고, 피라미드와 같이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자가 왕이요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다. 왕이요 이긴 자가 된다는 것은 곧 의(義)를 가진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의는 나라의 근간이기도 하고, 또한 목적의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다보면 언젠가 아니면 또 어떤 분야(세계)에서는 반드시 패자가 되기 마련이다. 올림픽의 어떤 종목도 계속 한 사람이 1등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도 매년 바뀌는 것이 그렇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적인 문제가 더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외모는 사람의 생김새가 아니다. 외모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모든 소유와 공로와 능력을 말한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릇이라는 외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자리는 바로 위대함을 좇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자리,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곳에 아브라함이 있을 때는 아들이 없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가진 가치관은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그러니까 생명이 아닌 자리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떠나서 아들을 얻는 자리, 곧 생명이 있는 자리로,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여정을 수종했다. 애굽으로 눈도 들렸고, 자기 안에서(자신이 거하는 땅) 다툼이 있는 시절도 거쳤고, 자신의 의지로 아들(이스마엘)을 얻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 과정들 하나하나는 어떻게 볼 때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의 여정은 아브라함이 잘못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벌을 주시듯 험난한 여정을 주시는 것과 같은 여정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얻기 까지 우리 안에서 처리되어야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에 대한 것들이다.
롯을 보자. 위대함을 버리고 나왔지만 롯이 함께 했듯이 신앙의 여정에서 오랫동안 위대함을 좇던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롯을 통해 보이셨다. 그리고 결국은 그 롯과의 갈등이 일어날 때에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길로 가게하고 아브라함은 남은 땅을 선택했을 뿐인데 그곳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땅이 되었다. 우리 안에 위대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참 오랫동안 있지만 그것이 자기 좋은 것으로 가게 두면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사람은 흙)인 사람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모든 여정은 우리 각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그것에 맞추어 살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얻는 땅과 자리까지 가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날 때, 그 새로운 생명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우리의 삶을 보고서 또 다른 이가 나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 또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삭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나이 99세에 아들을 주겠다고 하니 이미 생리가 그친 사래가 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들을 얻고서는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신다고 해서 이삭이라고 했다고 했다. 이것은 분명히 간증이다.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된 사람, 그리고 그 삶으로 인하여 또 다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된 아들을 얻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언컨대 맛보지 못한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리, 그 기쁨의 자리까지 가라고 위대함을 좇는 본토 아비 친척의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보고 듣는 이들도 세상의 위대함을 좇는 자리에서 아들을 얻는 자리로 떠나라고 성경을 오늘에까지 전하시고 아브라함의 여정을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을 읽고 듣는 이유이고, 읽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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