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삼촌 라반이 그 일의 값을 쳐주겠다고 하면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에 야곱은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하고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일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였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과의 약속을 깨고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를 혼인한 날 밤에 들여서 야곱을 속이고 또 다시 7년을 수고한 다음에야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얻는다. 사람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삶의 모양을 갖추고, 후사를 얻으며, 자기의 의를 표현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의의 형식을 취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네게 장가들어(호 2:19)’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말씀 역시 하나님의 의를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야곱도 아내를 얻고자 했다. 즉 그렇게 자신이 사모하고 얻기 원한 장자의 명분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니 7년이라는 세월을 수고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음은 어떤 행동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믿는 마음이나, 입술의 고백이면 된다는 것을 큰 착각을 한다.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그 오판과 착각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절대로 상충되지 않는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같은 말씀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는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없는 물체는 죽은 것이듯, 행함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기에 행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왜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이야기를 할 때 말 하는가 하면, 야곱이 아내들을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점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교회에 있는 독자인 청년 하나가 그 교회 안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한 후 몇 개월이 되어도 아버지 집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신앙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참 어이없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삶을 산다. 신앙만 있으면 선하고, 신앙이 없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시간 낭비며, 하나님 앞에 송구한 일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은 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육신이 속한 사회와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형식을 신앙과 분리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영지주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견해이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섬기는 삶을 살아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에 따라 종이 되어 섬김으로 아들을 낳은 여자(아내)를 얻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야곱이 라반의 법에 따라 종살이 하듯 수고한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권력이나 권세로 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어떤 것보다 권세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과 다른 정체성의 신앙을 가졌는데 그 권세가 자신의 것이 될 리는 없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그 믿음과 신앙으로 그 신앙이 없는 사람(하나님 앞에 여자)들의 법에 따라 종과 같이 수고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 복 받으려면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생각은 오만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고, 그 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의(義)가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이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가진 법 앞에 죄인 같이 종이 되어 그가 옳다고 여기는 법에 따라 육신으로 수고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 너무 옳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죄인이며, 그 따르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죄인이며, 그 사람이 부모든 은사든 누구라도 다 그렇게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사탄의 일이지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수고하는 야곱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며,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며, 십자가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며, 자신과 같은 의를 가진 사람을 얻으려면, 형식을 취하여야 한다. 아내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간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또는 누린다고 하는 것은 다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수고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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