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모든 사람이 고향이라는 것에 향수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은 땅의 좌표나 주소를 기준으로 아비의 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내가 지시할 땅>이 바로 야곱이 돌아가야 할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땅의 어떤 위치, 좌표나 주소로 대변되는 어떤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정체성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야곱에게 너의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개라는 말도 알고 보면 가던 길을 돌아서 원래 자리로 간다는 의미인 점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어떤 삶을 살든지 결국은 자기의 정체성을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삶의 모양은 두 번째 문제다. 야곱이 돌아갈 땅의 지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듯. 사람은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그것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또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를 읽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그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사람은 아니다. 이 야곱에게 있어 자기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야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선택하신 민족과 나라의 조상이라는 점이 그렇다.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이스라엘은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표현된 나라)라는 것을 안다면 이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시작되는 사람, 즉 교회를 누리려는 사람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이 정하신 땅, 곧 사람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나 야곱이 자기 본토로 돌아가는 문제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고향에는 자기 형 에서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장자인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빼앗겨 이를 갈고 있는 에서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에서는 야곱의 입장에서는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기에, 그 에서가 있는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교회를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삶을 사는 것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장자가 아닌 에서(팔아 버렸으므로)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에 거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있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모든 세상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창조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잊고서 살아가는 세상과 같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하시려고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그 피를 자신들에게 돌리라 외친 것 역시 장자의 명분을 판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런 세상, 그렇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가 있는 땅에 야곱이 돌아가듯,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예수 좀 믿는다 싶으면 세상을 등지려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이 본향으로 가는 것과 같은 신앙의 여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중요한 문제다.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는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교회와 온전한 교회에 속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교인들은 자기들끼리 희희락락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서 간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특별히 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땅에도 사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이 갈 때 특별히 주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이 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유목인이고 목자였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 자리는 누가 있는 것이 아닌 자리라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이란 그렇게 고백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이 돌아가려는 조상의 땅은 그냥 갈 수 없는 상태였다. 에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팔아 버린 사람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이다. 육신의 배고픔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있는데, 그곳에 돌아가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라는 것을 야곱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신앙의 여정에서 아주 중요하다. 한 사람의 신앙이 개인의 신앙에서 공동체의 신앙으로 접어드는 여정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여정을 간 사람이 바로 야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앙, 공동체의 신앙의 세계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가 있는 땅, 원래는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야곱이 주인인 그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교회의 참 모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욱이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두려웠음에도 그 땅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는 세상이 우리를 삼키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있기에 그곳으로 속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신앙을 삼키려하니 가능하면 그런 위험에서 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끔 아니 너무 많은 순간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풍습을 신앙에 해가 될까 멀리하는 것을 보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신앙에 자신이 없나?’라고. 물론 객기 부리듯 일부러 그것과 마주치려는 것은 교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자신이 삼킬 것이라며 그냥 피하는 것은 야곱이 에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땅, 곧 사람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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