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품삯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2. 10. 13:24 Writer : 김홍덕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거하면서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일하니 라반이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라반의 소유일 뿐 야곱의 소유가 아니었다. 이에 야곱이 자신의 수고에 합당한 품삯을 받아서 자기의 집을 이루려 떠나려 마음을 먹고 라반과 약속을 한다. 그런데 이 약속이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내용은 이렇다. 라반이 가진 양과 염소 중에서 점이 있는 것, 또 얼룩진 것(아롱진 것), 그리고 검은 것을 다 가리어 낸 다음에 그것들은 별도로 두고서 그 외의 양과 염소에게서 점이 있거나, 아롱지거나, 검은 것이 나면 그것은 야곱의 것으로 삼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야곱이 양떼(점이나 아롱지지 않고 검지 않은)가 물을 먹으러 올 때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취해서 그 껍질을 벗겨서 흰무늬를 낸 다음에 그 가지들을 물을 먹는 물구유에 세워서 양떼에게 향하게 했더니 그 양과 염소가 물을 먹을 때에 새끼를 배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새끼들이 나서 다 야곱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야곱이 약한 양과 염소가 물을 먹을 때는 가지를 두지 않았기에 튼실한 새끼들이 다 야곱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본다면 양이나 염소의 새끼는 그 부모의 유전적 형질을 따라 부모가 점도 없고, 아롱지지 않았고, 검지 않았다면 새끼들도 그래야 하는데, 버드나무, 신풍나무, 살구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양과 염소가 물 먹을 때 양과 염소를 향하여 세워 두었더니, 점도 없고 아롱지지 않았고, 검지 않은 양과 염소가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양과 염소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만, 왜 야곱의 품삯이 이것이냐 하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야곱에 관한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야곱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나의 말씀이 되고, 삶이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드리는 제물은 점도 흠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제사의 규례이다. 이는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의 때부터 지켜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명분, 곧 장자의 명분인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는 야곱이 왜 제사에도 드리지 못하는 양과 염소를 자기의 품삯, 즉 자기 수고의 값으로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품삯과 수고는 같은 가치인데 말이다.


버드나무, 신풍나무, 살구나무는 모두 가지의 껍질이 거칠고 흠이 많은 나무다.(식물학은 잘 모르지만 사진으로 봐도 확연하다.) 양과 염소가 점이 있고, 아롱지고, 검다는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인생의 육신, 즉 인생의 겉모양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겉모양은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삶을 우리의 본질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은 아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관점이고,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관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겉모습, 육신의 행실과 사회적인 지위와 같은 것이 고상하고 높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또 그것에 간절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야곱의 삯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점도 있고 아롱지며 검은 양과 염소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삯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겉모양이 거칠고 검고 흠이 많은 버드나무, 신풍나무, 살구나무를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가 나오게 해서 양과 염소가 먹는 물에 세워 두었다. 이것은 마치 할례와 같다. 껍질이 없는, 겉모습을 보지 않는 말씀(물)을 먹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이의 몫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가치는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모양, 껍질이 벗겨진 말씀을 먹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명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께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물로 늘 표현되는)을 겉모양대로 보고 지키려 했고, 사람도 외모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 했고, 예수님의 신분이 나사렛 출신이라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으며, 겉모양이 창녀인 사람, 세리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은 라반과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한다. 그것도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 말씀은 늘 타협한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나 범사(모든 일에)에 감사하라는 것과 같은 것은 뭐랄까 그런 마음만 가지면 된다거나,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식으로 타협해서 가르치고 또 그것을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목적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삶을 주관하는 의미와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라반과 약속하기를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양과 염소가 그렇지 않고 하얗고 점과 흠이 없는 양과 염소를 낳도록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겉모습에 점과 흠이 없는 생명이 아니라 먹는 것, 마시는 것이 껍질이 없는 것을 먹는 생명, 자기의 몸과 하나가 되는 음식이 겉모습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명, 하나님의 의를 먹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태어난 양과 염소가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것이 야곱의 양과 염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정리해보면 하나님 백성의 삯이요 분깃은 겉모습이 정결한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지키고, 자기 삶의 겉모습을 잘 단속하고 절제하고 경건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먹는 사람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의 본질인 말씀과 율법을 주신 목적을 마시고 먹은 사람은 겉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흠 있는 모습일지라도 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 안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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