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곧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옷도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해 입혔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볼 때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37:1-4)


그런데,

요셉도 성경을 보면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다른 가족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자신의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형들의 시기가 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런 상황, 아버지가 더 사랑해서 채색 옷을 입히며 다른 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표현되었기에 형제들이 이미 마음이 불편한데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그 형제들에게 형제들이 미워하는 요셉을 섬기게 될 것이라며 꿈 자랑을 하고 있는 이 요셉의 모습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이 시간에 한 번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요셉과 예수님을 비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이 땅에 보내시었는데(창조하셨는데) 예수님의 처음은 보통의 사람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채색 옷을 입었지만 요셉은 그냥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듯,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잠깐 이 부분을 언급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 우리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과 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가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예로 든다면,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었다고 하는 인생을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신데, 그 능력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기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육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그때 살아난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든지, 아니면 지금도 정기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해보면,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하여 당시 유대의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계셨고, 그것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첨언한다면, 성경에서 옷은 보통 신분을 말합니다. 채색 옷은 예수님께서 얻으신 신분, 백성들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 여김을 받은 그 여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아주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채색 옷을 입혔기에 형제들이 미워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말씀을 행하시므로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또 메시아로 인정받는 상황이 되었는데 같은 민족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아주 싫어했다는 것이 요셉과 예수님이 공통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12형제들 중에 11번째 아들입니다. 다른 형들이 볼 때 요셉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이미 장성했기에 가사(목축)에 도움이 되고 있었지만 요셉은 그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들의 안부나 확인하는 정도 밖에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공로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어린 동생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한 것도 없으면서 집을 위해, 또 아버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형들이 그 어린 동생에게 절하게 된다고 하니 참 가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잘 안위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율법을 잘 지키고, 또한 백성들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온 나라가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까 힘쓰고, 금식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하나 나와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목숨을 다해 지키고 있는 율법은 막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하니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셉의 일과 또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의로워지려고(인정받고 복 받으려고)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취하고 있는 삶의 모양이 결국 그들이 가진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무엇이 가치가 있느냐의 관점이므로 그것은 결국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자기 삶의 채근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혈연이나 사회 조직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고 요구하며 심지어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관,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야,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가치관의 뿌리가 행동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그 공로를 자신들과 비교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교회에서 또 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 늘 그것이 기준이 됩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

성경을 얼마나 보느냐?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

교회 행사에 얼마나 참석하느냐?

교회에 봉사는 얼마나 하느냐? 등등


이런 것들을 늘 판단합니다. 딴 것 볼 것 없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주보에 다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했는지 알리고, 또 남이 얼마나 했는지를 보라고, 또 그것이 누적되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관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보았듯이, 지금도 신앙이라 교회가 요구하는 것 또 성경에 기록된 것을 얼마나 몸으로 행위로 또 소유로 지켜내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관점, 그 가치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가치관과 생각은 모든 행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공로와 소유의 드림)=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고, 교회 시스템이 그렇게 운영되고, 주보에 공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가치관이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또 누가 아프거나 하면 옆에서 가장 먼저 권면하는 말이 “하나님께 뭐 잘못 한 것(Do or Have)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혹시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봤다면, 어디 좋지 않은 곳을 가는 곳을 봤다거나, 그런 공로의 신앙에서 볼 때 해서 안 되는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그것 때문에 그렇다.’고 단정하고 소문을 냅니다. 이것은 소문을 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심지어 나름 영발이 있다는 사람들의 행태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하고선 예를 들면 ‘십일조 잘 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하나님께 해야 할 <행동>을 잘 하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떳떳할 사람이 없습니다. 행위로 의로워질 사람이 없다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사람이 곤고하게 된 이유가 ‘너의 행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이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는 형들의 관점,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관점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순종하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는 가장 근본된 것은 사람 자체로는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막내급 요셉이 하는 것도 없이 형들과 아버지의 절을 받는다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것도 모자라서 율법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육신으로 사는 인생의 일이 잘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람이 행동으로 얼마나 성경을 지키고 교회에 공로를 쌓고 재물을 드리느냐에 종속된 것이라는 신앙은 전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그 자체는 온전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요셉의 일과 또 예수님의 일을 볼 때 생각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이라는 것, 또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행위로 의로워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로서 의로워진 사람, 그냥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또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로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 그 하나가 삶과 신앙에 있어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셉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것을 계속 이야기 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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