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10. 12:2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들 셋을 얻고 장자에게 아내를 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들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므로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 동생 오난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계대결혼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둘째 오난은 형수에게서 얻는 후사가 자신의 후사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형수의 몸 밖에 사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또한 악함으로 보셔서 오난까지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음에도 전통에 따라 다말을 셀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셋째 아들도 죽게 될까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셋째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을 때에 창녀로 위장을 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게 그 화대에 대한 증표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말이 잉태하게 되자 유다는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심문할 때에 다말이 자신을 잉태케 한 자의 증표로 유다의 물품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때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쌍둥이)이고,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됩니다.(마 1장)


이 사건은 우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아들을 얻는 것이라는 점에서 부도적적으로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면 아마 롯의 두 딸이 자기의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각각 아들을 낳은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은 이방 족속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다말이 낳은 아들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되며,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자 중에 다말이 속하게 되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여자가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의 후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의 뜻을 시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이 여자와 같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듭난 생명을 얻어야하는 운명을 가진 모든 사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말과 롯의 두 딸이 차이가 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거듭난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그 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로 인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인 다말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백성인 남자의 아들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반면에 롯의 두 딸은 자신들의 의가 아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롯의 큰 딸이 동생을 꼬일 때에 하는 말이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창 19:31-32)라고 말을 합니다. 롯의 두 딸의 일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세상의 도리를 좇은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고, 다말의 일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후사를 얻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이 가하냐?’는 것일지 모릅니다. ‘딸과 아버지보다야 낫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보고 ‘나보다 옳다.’고 했습니다. 다말이 잘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입니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는데 예수님께 낫게 해 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따라가니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6)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답하고 간구하였더니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며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나 우선 보기에 그 부정함의 차이가 있어 보이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에 있어 행실이나 행위가 그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과 의로움을 따질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거듭나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되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되냐?’ 라든가,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막 해도 되냐?’와 같은 것들입니다. 먼저 말씀을 드릴 것은 온전한 믿음은 아무 짓이나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뭐든지 맘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과 항변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하면 안 되니 하는 것>과 <할 수 밖에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그 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DNA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해야 뭔가가 된다니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때로 못 지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렇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적질하고 간음할 방법이 없습니다. 개가 ‘야옹’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경대로 살아야 자신이 목적하는 것, 천국에 가는 것이나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자기 의지로 해야 하지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 둘 중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물론 유다와 다말의 일은 범상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말이 바란 것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가 되었기에 그 후사를 이으려 했을 뿐입니다. 롯의 두 딸과 같이 세상의 도리를 좇은 배필을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정해진 혈통 안에서 후사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세상의 가치관을 채웁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래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부자가 되고 더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라 여기는 세상의 도리를 좋은 배필을 구하고 삽니다. 롯의 두 딸의 모습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낳은 모든 후사는 다 이방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자신들의 아버지의 후사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후사를 잊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세상의 도리였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의 가치인 재물과 명예(세상의 도리)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와 그 신앙이 이방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달랐습니다. 그가 좇은 것은 세상의 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집안의 여자로서 유다의 후손을 낳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기에 자신이 창녀의 차림이 되고 또 그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어떻게든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아들과 같이 다시 후사를 얻을 수 있는,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다 버리고 그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요셉의 사건이 전개되는 중간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과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상관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일은 어떤 일인가?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되는 과정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 참 생명을 가진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사람들로 시작되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말과 같은 사람,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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