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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빚?


주기도문에서 간구하는 내용은 4가지 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하시 마옵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이렇게 네가지 이다. 이런 간구들 앞에 나오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이 모든 간구의 대 전제이며 선언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당연히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와 존재의 권세를 선언하는 것이다.


하늘이 바뀌면 당연히 땅이 바뀌듯,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가 비록 세상의 도덕과 법 아래 성인 군자라 해도 그는 죄인일 뿐인 것이다. 하늘에 봄이 왔는데 땅이 녹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고, 땅에 거하는 사람과 짐승들은 그것을 심판하여 고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은 다 죄인인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먹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라고 앞에 포스팅 했다.


그리고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또 어떤 간구인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를 영어 성경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Sin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deb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NIV 1984년판)이라고 되어 있다. 킹제임스 버전 역시 문장은 비슷하고 죄라는 단어는 동일하게 debt를 사용하고 있다. debt는 채무, 빚 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직역에 가깝게 번역해 보면 “우리가 우리의 채무자를 잊어버린 것 같이 우리의 채무를 잊어 주십시오”가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메겨 놓으신 우리의 존재 목적을 달성하여 하나님께 빚을 갚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빚이 있다. 즉 갚아야 할 채무가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그 만든 사람과 주인에게 잘 굴러다니고 안전하게 다녀야 하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목적 안에 빚이 있다. 우리는 흔히 물건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죽었다’라고 한다. 시계가 가지 않으면 죽었다 하고, 다른 물건들도 잘 작동하지 않으면 요즘 흔한 말로 ‘맛 갔다’라고 한다. 즉 죽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빚을 진 것이고 창조주와 주인에게 죄가 되는 것이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은 그 주인에게 빛을 밝혀야 하는 빚이 있는데 빛을 내지 않으므로 죄가 있는 것이고, 시간을 알려주기를 바라며 구매한 시계가 가지 않으면 시간을 알려야 하는 빚을 갚지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빚진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 채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목적 안에서 빚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메겨 놓으신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슈퍼맨처럼 만드실 수 없어서 이렇게 약하게 지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하셔서 세상을 만드셨다. 


그래서 세상 안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강한 것이 많다. 온 우주와, 지구에 있는 천둥과 번개며, 태풍은 물론이고 화산이며, 큰 해일이며, 또한 높은 산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강과 같이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것을 다 하나님께서 이미 만드셔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고 위대함을 가지셨는지 충분히 표현 하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자기 맘대로도 못살게 만드신 것은 그런 연약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 되시며, 그 모든 것 안에는 연약함을 대함으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품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만들어 놓으셨는데, 언제나 연약함은 버리고 더 위대해지려고 늘 노력한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연약하고 나약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라 규정하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선악과이다. 


하나님만이 선하신데,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사람 안에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사람의 존재 목적을 더 강해지고 더 위대해지고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고 더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함이라고 규정하는 자리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라는 것은 외면한 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셨지, 아직 부족하니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심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자리를 떠난 것이고, 아직 빚을 갚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빚을 갚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책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려고 애쓰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더 위대하고,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외면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 이상으로 그러한 것을 쟁취하는 것을 삶의 목적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죄를 하나님 앞에 사함을 받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루어 빚을 갚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얼마나 그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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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기도문은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후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외식이라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삶의 한 형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형식에 치우치고 그것에 의를 두고 형식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그것이 하나님을 잘 신앙하는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외식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큰교회의 좌표가 어디인지 보인다.

 

이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두신 그 뜻과 목적 안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신 뜻과 목적과 의가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의 형편과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충족시켜주시기 위하여 가르치신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비단 주기도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기도가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 육신의 떡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깊이 새기고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은 영어로는 Bread이다. 이것은 우리 성경에서는 “떡”으로 번역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수 없이 떡이라고 표현 하셨는데, 특히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부터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장 31-35)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것은 육신의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먹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인육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어떤 존재이야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먹는다는 것, 그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왕이요 제자상이요 선지자인 그리스도 아니신가?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양식으로 주옵소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신분과 본성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인 것이다.

 

 

인생이 육신 가운데서 살아가다 보면 육신에 관한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품위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과 또 때로 오락과 유희를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많고, 또한 자식과 부모와 같은 혈연이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에 까지 참 다양한 욕구와 바램이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이미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리가 필요한대로 사용할 수 있게 이미 주신 것이며, 그 모든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아들의 삶은 그것을 자유옵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바라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우신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며, 그 뜻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자를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하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되므로,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삶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 즉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양식이요, 우리의 정체성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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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장 7-12절에는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고 다음으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범사에 기쁘시게 하시고’라고 하고 있다. 기쁨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살면서 겪게 되는 감사하기 어려운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그런데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사람이 기뻐하는 일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즉 자기에게 합당한 일에 기뻐하는 법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쁘지 않다.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작년에는 향토 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해서 기뻤다. 하지만 다 그랬겠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기뻐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멀리 볼 것 없이 같이 사는 아내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고향도 같은데 말이다. 그렇듯 우리가 어떤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그 일이 나와 상관이 있어서 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 역시 당연히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일에 기뻐하실 것이다. 당연히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기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과 무관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라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하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사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었을 때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사람 역시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할 것도 없는 것이다.


주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수성 페인트를 기름에 녹이면 사용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니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존재의 신 앞에 행할 바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행위나 소유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그 분은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존재로서 만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가 아니었다. 또 하나님은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 와서는 굳이 장소에 관하여 어디 있느냐 물으심도 아니다. 이는 “너의 정체성의 자리가 어디냐?” 라고 물으심이다.


죄(罪)의 어원은 하말티아(hamaltia)인데 이는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죄’라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당연히 죄 가운데 있다면 어떤 경우라도 기쁠 수가 없을 것이다. 


주께 합당하다는 것은 주님의 정체성에 맞는 자리에서 범사에 기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산신령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생에게 정한 자리에 합당하게 있음이 기쁨이 되기를 바울 사도가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리이다.


사람의 하나님께 합당하게 되는 자리는 위대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로부터 모든 성경에서 인간이 자신을 강하게 하고 능하게 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는 모든 것을 벌하셨다. 바벨탑을 쌓을 때도 흙을 구워서 탑을 쌓았다고 했다. 흙은 인생이니 인생을 강하게 하면 사람이 하늘에 닿을 것이라며 쌓았던 것이 바벨탑이었듯, 오늘날 시험을 잘 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믿는 모든 것이 다 시날 광야에서 바벨탑을 쌓던 그 모습과 같은 것이다.


솔직히 사람은 모든 일생의 범사에 감사하거나 기뻐하기 힘들다. 적어도 인생의 목적과 의를 소유와 능력(행함)에 둔다면 죽는 날까지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육신의 어떤 것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정체성이 철저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수고로 영광을 돌리는 종이 아니라, 존재로 기쁘게 하는 아들이 되는 세계 안에서의 삶에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밖에 받을 수 없는 운명 같은 본성이 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도했듯이 우리 또한 그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며 살 것인가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생이 될 때 바울 사도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데 뭐가 그리 필요한가? 그저 태어나기만 해도 그렇게 좋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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