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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을 위하여 간구를 한다고 했다. 그 간구의 내용이 9절에서 12절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먼저는 너희 안에 있는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간구했고, 다음으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연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주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뜻이 좀 포괄적이라 영어 성경을 한번 참조해 보면,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뜻은 ‘주님의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며 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 또한 주님에게 가치를 둔 삶을 사는 것이 합당히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범사에, 즉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모든 일에 주를 기쁘시게 살 수 있을까? 만약에 이런 의문이 든다면,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의 뿌리는 나의 업적과 소유를 바침이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늘 수고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 하는데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어떤 날은 좀 눕고 싶고, 또 어떤 날은 신이 나서 뭔가를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그런 모습으로는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정죄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 하셨다. 즉 뭘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내게 기쁨이 되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그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성도요 또한 그분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을 모든 범사에 기쁘시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뻐하는 자라는 것은 존재가 기쁨을 주는 자니 뭘 해도 기쁘다는 뜻인데,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존재로 다가가지 않고 공로의 업적과 소유의 드림으로 다가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치고 예수님께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싶지만, 가치는 그 목적에 맞게 가치를 두어야 한다. 얼마 전 TV ‘안녕하세요.’에서 다른 것에는 짠돌이면서 축구공에는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축구공을 관상용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아들이 유치원인가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는 것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축구공은 보는 것인데 발로 찬다고 말이다. 이게 진정한 가치 부여인가? 아님 정신 나간 짓인가? 축구공은 축구장에서 차고 좋은 경기가 되도록 할 때 제대로 가치를 부여한 것이지, 집에 잘 모셔둔다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을 숭배하고 존중하고 사람이 감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가치만 부여하고 있다면 그 정신 나간 축구공 수집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죄가 없다면 나도 죄가 없는 존재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어야지,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혹은 네가 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 도무지 뭐가 맞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있어서 되겠느냐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죄 없다 할 수 없는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같은 존재가 되어 나도 그분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아들로서 또한 죄 없고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이 제대로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없는 인생은 자신이 하나님께 일을 하고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예배하는 자요,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격하시켜 가치를 상쇄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는 없다. 그에 합당한 경륜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 교리가 정한 것을 뇌까린다고 되는 세계가 아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You may live…… 라고 되어 있지 않는가? 즉 삶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교리가 그렇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존재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도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아들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주님을 가치 있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는 마치 아들이 그 존재만으로 그 부모의 기쁨이 되듯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간구하는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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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1. 13:20 Writer : 김홍덕

3rd Temptation



예수님이 받으신 마지막 시험은 마귀가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하심으로 물리치게 되고, 이어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들었다(마 4:10)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세 번째 시험은 누구에게 절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시험은 무엇을 진정한 본질이라 여기느냐? 하는 질문이자 유혹이다. 절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며 근원이고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창조한 대상 혹은 그것이 자기 삶의 근원이라 여기는 것을 경배하고 그것을 신으로 삼고 기도하고 경배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마귀가 하는 시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임을 인정하면 네가 본질로 여기는 이 모든 것은 네 것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절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경배의 목적이고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의 근원은 보이는 물질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며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본질은 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험의 내용이자 목적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질에 대하여 헷갈리고 유혹을 받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고 그것이 영광이라 여기기에 그것에 쉽게 절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질은 하나님이시지 세상 만물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본질이 되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히 11:3)”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골로새서에서 바울사도는 “만물이 다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하셨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책에 적힌 글씨가 본질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본질이다. 심청전에는 효도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본질은 효(孝)인 것이다. 이렇듯 보이는 것과 본질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앙하고 경배한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좇아간다. 그것은 결국 그러한 것들을 경배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경배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답변을 하셨다. 이것은 또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서 고백되어져야 하고, 다음은 온 세상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게 복음 전파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실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은 본질을 표현한 형식이고 표현 양식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동차도 본체라는 형식이 있고, 이동과 운송이라는 내용이 있듯, 컴퓨터도 하드웨어가 있고, 소프트웨어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계산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것은 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 중에 이것에 대하여 예외인 것은 없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 즉 본질이 있다. 그래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본질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형식의 본질,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뿐이기에 이 모든 세상이 형식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본질인 나라는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만물이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된 것은 하나님과 세상, 세부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이 그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법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용이시며, 의를 가지셨으며, 목적이시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더 정확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중에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듯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충실히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어둡다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맹인을 고치신 것은 육신의 눈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러신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맹인인 사람이 세상을 보지 못하듯, 영적인 맹인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심으로 무엇이 본질인지 똑바로 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끊임없는 시험이다. 사람이 눈만 뜨면 보이는 세상에 늘 속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이김을 위하여 이기셨고, 또한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긴다. 큰 교회들은 더 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꾸며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는 반대로 마귀에게 유혹당하고 패배한 것 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연약한 인생들은 예수 잘 믿을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비판하며 개독교라 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하신 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큰 교회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믿기 때문이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정치적 왕이 되어서 오늘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올 것이라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도무지 어디 계신건가? 그래서 큰 교회들이 예수님은 없는 십자가만 부적처럼 앞에 달아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세상에서 성공한 왕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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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Ⅲ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0. 15:54 Writer : 김홍덕

영원한 신앙의 유혹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 세 가지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쩌면 영원한 신앙인의 시험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고로 신비롭고 기적이 있거나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떡으로 만든다는 것은 돌에 새긴 율법을 사람이 다 지킬 수 있게 하라는 이야기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극복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물과 불이 나오는데, 물은 말씀을 예표 하는 경우가 많고, 불은 기적을 예표 한다. 성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모세이다. 그는 시내산에서 직접 하나님께 돌판에 새긴 율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름 자체가 ‘물에서 건진 자’라는 의미이고, 큰물을 건넌 지도자였고, 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운명에 거하게 되는 선지자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모세 = 율법, 그리고 물의 선지자 하면 모세를 떠 올린다.


반면에 불과 기적의 선지자라고 하면 또 단연 엘리야이다. 그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상대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는 죽은 사람도 살리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서 오늘날에도 엘리야의 때와 같이 라고 찬송을 부를 정도로 그는 이적을 대표하는 선지자요 불로 대변되는 선지자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전혀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만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가셨었을 때에 두 사람이 나타나서 변화하신 예수님과 함께 만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 17, 막 9, 눅 9) 그 광경이 얼마나 좋았는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라고 소리치게 된다. 하지만 곧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여 눈을 떠 보니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사건이 바로 변화산 사건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실 그 때에, 산 아래에서는 어떤 귀신 들린 아이를 그 아비가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하며 말하기를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5)”라고 이야기 하나,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 위에서는 베드로가 율법의 선지자요 물의 선지자인 모세와 기적의 선지자요 불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어떤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져서 고쳐달라고 하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 대칭이 되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늘 예수님을 믿는 것에 엘리야와 같은 기적이 더하여 지면 좋은 것이고 더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긴다. 또한 모세와 같이 율법을 잘 지킬수록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여긴다. 요즘은 복음의 시대인데 누가 율법을 잘 지키겠냐고 하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그 공로가 인정받는 모든 것은 율법의 세계이다. 사실 큰 교회에서의 주일 성수와 같이 지켜야 신앙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이 다 율법이다. 생명의 세계라면 금해도, 하지 말라고 협박해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생명의 세계 아닌가? 개를 ‘야옹’소리 내게 할 수 있는가? 그것처럼 도무지 예배를 빠질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생명의 세계이나, ‘안 오면 죄야, 하나님께 혼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율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킬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엘리야가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세계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임신했는데, 아들일 줄 믿는다고 기도했다면, 설사 딸이 태어나도 아들로 바뀔 것이라고 믿어야 믿음이지, 딸이 태어나면 자신이 믿고 기도했던 것은 헌 고무신처럼 던져버리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큰 교회에서는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을 신념으로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 착각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주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겨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착각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없는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기적을 바라는 신앙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그 때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외치는 소리를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볼 때 저렇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달려 있다면 엘리야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바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들이 죽지 않게 받쳐 줄 것이라고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과 그 세계가 같은 것인데, 일상의 생활 중에서도 ‘믿는 사람한테는 그런 일 없다’라던가, ‘어머, 믿는 사람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고?’하는 생각들이 다 기적을 바라는 그리고 기적이 있는 것이 신앙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마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그때 산 밑에서는 간질에 걸려 불에 넘어져도, 물에 넘어지는 아이를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고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머리가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칠 수 없었다. 산 위에 있는 베드로나 그들이나 다 같이 예수님 더하기 엘리야 그리고 모세가 좋다고 여기는 마음이나, 머리를 뺏겨서 불과 같은 기적으로 고쳐보려 불에도 넘어지고, 또한 율법으로 고쳐보려고 물에도 넘어지는 귀신 들린 자나 그 신앙적 안목과 마음이 같은 마음인지라 고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기적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말씀을 잘 지키면 좋겠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귀신 들린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떠난 사람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도, 율법의 선지자 모세도 아니며, 또 예수님 + 모세 + 엘리야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을 떡으로 만드시지도 않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라 여기시지 않는, 즉 율법을 지키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초막을 지어 함께 하듯 부가되는 것이 아닌 그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서 연약한 육신의 모습 그대로 죄인으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하신 것이다.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은 그와 같은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처럼 변화산상의 베드로의 마음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만들어라’는 것이며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기적이 함께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는 그 마음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마음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만의 마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의 영원한 시험이고 유혹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초대교회에도 그치지 않아서, 결국은 육신을 부인하고 천사를 숭배하거나 아니면 영지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또 골로새 교회와 같이 같은 값이라면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 더 교회의 지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모두가 이 시험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 안에서 이러한 유혹은 언제나 끊이질 않는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으면 좋겠다.’라던가 세상적인 Spec.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더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이 유혹은 정말 정말 끊이지 않는 인생의 시험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있는 간구인 것이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번 하려고 자신의 삶을 늘 되새김질 해 가다 보면 우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바라며, 또한 신념을 얼마나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는지 놀라운 정도이다. 그렇게 신념으로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기적이 있어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아는 것이 바로 인생의 끊임없는 유혹인 것이다. 필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 마음 속의 유혹과 싸우고 싸워 왔다. 그리고 이것은 늘 기도해야 하는 우리의 기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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